"가두의 도서관" 학생들 서점서 책 읽는 '입독' 문화 생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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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5호 27면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종로에 밀집한 서점

한국 서적상 효시로 알려진 회동서관. 소설과 실용 서적 등 다양한 출판 사업을 펼치며 192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사진 출판문화]

한국 서적상 효시로 알려진 회동서관. 소설과 실용 서적 등 다양한 출판 사업을 펼치며 192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사진 출판문화]

19세기 말, 조선 사회는 외국의 신식 문물과 지식 도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개화한 지식인들은 근대적 지식 보급을 위해 ‘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896년 6월 2일자 「독립신문」의 논설은 ‘책 회사’의 설립을 촉구했다. ‘각색 서양 책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출판’하는 회사를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책을 만들고 파는 일은 문명개화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이윤도 많이 남는 ‘큰 사업’이라고도 했다. 개화기의 서적업은 꽤 전도유망한 사업이었다.

충무로·명동 일대엔 일본인 서점 성업

1890년대부터 종로통과 그 주변을 중심으로 책을 파는 가게가 속속 등장했다. 간판에는 서사(書肆), 책사(冊肆), 서포(書舖), 서관(書館), 서림(書林), 서원(書院) 등의 상호를 걸었다. 책을 의미하는 한자와 가게나 공간을 뜻하는 한자를 붙인 용어다. 이 상점들은 책을 파는 일뿐 아니라 만들고 수입하는 일도 겸했다. 책의 출판·유통·판매가 나눠져 있지 않던 상태였다. 출판사나 서점 같은 용어는 1920년대에 대중화되었고, 그 이전의 업계에서 통용되던 명칭은 서적상(書籍商)이었다.

개화기에는 지물포와 잡화점 같은 곳에서도 책을 팔았다. 1907년에 발간된 신소설 『귀의 성』 광고에는 대동서시, 고유상서포, 김상만책사 등과 함께 지전(紙廛), 잡화점, 문방구서점이 판매 장소로 기록돼 있다. 이 상점들 중 일부는 점차 전문적인 서적상으로 변모해 갔다. 한국 서적상의 효시로 알려진 회동서관(滙東書館)이 대표적으로 그러했다.

회동서관이 고제홍서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 때는 대략 1890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고제홍은 원래 면포전을 운영하던 상인인데, 전업하여 청계천 광교 인근에서 서적업을 시작했다. 고제홍서사가 근대적인 서적상으로 성장하는 데는 아들 고유상의 역할이 컸다. 1906년경 가업을 이어받은 고유상은 1년 뒤 ‘회동서관’으로 상호를 바꾸고 본격적으로 영업에 나섰다. 고유상이 경영한 회동서관은 신구(新舊) 소설과 신문예 작품, 사전류와 학습서, 실용 서적 등 다양한 출판 사업을 펼치며 192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고유상의 형제인 고경상과 고언상도 각각 광익서관과 계문사 인쇄소를 운영하며 서적업계에 족적을 남겼다.

종로를 중심으로 성장한 서적상은 회동서관뿐만이 아니었다. 개화기에 종로통과 그 인근에는 서른 곳이 넘는 서적상들이 있었다.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대동서시(종로)를 비롯해 김상만의 광학서포(종로2가), 주한영의 중앙서관(종로3가), 남궁억의 유일서관(종로2가), 김용준의 보급서관(안국동), 민준호의 동양서원(종로2가),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야소교서회(종로2가) 등이 모두 한국 서적상계의 선구(先驅)로서 신문화 보급과 계몽운동의 일익을 담당했다.

불행하게도 ‘개화’의 시대는 ‘식민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조선의 서적상들은 신문지법(1907)과 출판법(1909)으로 상징되는 일제의 출판물 통제 정책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조금이라도 ‘애국계몽’의 색채가 있는 책들은 압수와 판금(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원고검열과 납본검열이라는 강력한 규제 장치도 서적상의 발목을 잡았다. 서점을 수색하고 단속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일본의 서점마저 식민도시 경성에 진출했다. 일본 서점들이 자리 잡은 곳은 청계천 남쪽의 본정통(本町通), 속칭 진고개(지금의 충무로2가) 근처였다. 1906년 개점한 일한서방(日韓書房)을 필두로 대판옥호서점(大阪屋號書店), 암송당서점(巖松堂書店), 마루젠(丸善) 등이 차례로 경성 지점을 설치했다. 원래 이 서점들은 조선 체류 일본인들의 문화생활 공간으로 마련되었으나 점차 일본어를 해득하는 조선인들도 자주 찾는 곳이 되었다.

1930년대 종로 서점가에서 최고 매출을 올리던 박문서관. 출판사, 인쇄소까지 갖춘 출판·서점 기업이었다. [사진 조선일보·동아일보]

1930년대 종로 서점가에서 최고 매출을 올리던 박문서관. 출판사, 인쇄소까지 갖춘 출판·서점 기업이었다. [사진 조선일보·동아일보]

이처럼 경성의 서점가는 종로·관훈동 일대의 조선인 서점가와 충무로·명동 일대의 일본인 서점가로 양분돼 있었다. 시설과 장서(藏書)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조선인 서점은 진고개로 손님을 뺏기기 일쑤였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종로의 서점가는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25년 12월경「매일신보」는 ‘누구나 책을 사려면 반드시 진고개로 향하였었던’ 시절이 있었으나 곧 사정이 나아져서 ‘종로통 일대에 늘어선 신명서림, 영창서관, 창문사, 동양서원, 박문서관, 경성서관, 덕흥서림 등 모든 상점에는 밤마다 밤마다 전등 아래에 서책을 고르는 청년 남녀의 자취가 끊일 줄을 모른다’고 했다.

절도 사건 잦아 ‘책 도적’ 양산하기도

책 살 돈이 없어 서서 책을 읽는 ‘입독’ 풍경. [사진 조선일보·동아일보]

책 살 돈이 없어 서서 책을 읽는 ‘입독’ 풍경. [사진 조선일보·동아일보]

지식인층은 진고개 서점 순례를 즐겼다. 예컨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신문사 사장직에서 물러난 여운형은 1930년대 말에 마루젠(丸善) 서점에 자주 들러 구미의 신간 서적과 잡지를 입독(立讀)하며 절치부심의 시절을 보냈다. 그가 즐겼다는 입독, 즉 서점에서 서서 책 읽기는 근대적 서점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독서문화였다.

가난한 학생의 입장에서 책을 사지 않고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었다. 한 전문학교 학생은 “가두의 도서관”이자 “강사 없는 교실”이라며 서점을 찬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입독은 아무래도 서점주나 직원의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실제로 입독하는 손님들을 은근히 압박해 쫓아내는 서점도 있었다. 서점에서 쫓겨난 이들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조선인들은 종로 탑골공원 옆에 있는 경성도서관(현 종로도서관의 전신)을 주로 찾았다.

누구나 서점에 들러 자유롭게 책을 꺼내볼 수 있는 문화는 ‘책 도적’이라는 ‘근대적’ 범죄자를 양산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주로 규모가 큰 서점에서 절도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주로 본정통의 일본인 서점이나 종로의 박문서관 같은 곳이었다. 책을 훔치다 붙잡힌 이들은 대부분 책 살 돈이 없는 가난한 학생들이나 훔친 책을 헌책방에 팔아넘겨 용돈을 버는 청소년들이었다. 당시 서적 절도 범죄는 비교적 엄중하게 다뤄졌다. 이광수 소설의 마니아였던 17세 소년은 책 한 권을 훔쳐서 종로경찰서에 붙들려갔다.

‘김병호(17)라는 소년은 소설 읽기에 중독이 되어 매일 같이 종로 2정목 박문서관에 가서 소설을 읽던 중 지난 13일 오후 4시 10분경 춘원 작 『무정(無情)』에 혹하여 몰래 이를 도적하여 가다가 점원에게 붙들려 종로경찰서에 인도되어 세상의 ‘무정’을 새삼스레 느꼈는지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겠다고 울고불고 있다.’ (「조선일보」, 1939년 10월 15일자)

이 소년이 『무정』에 중독되었던 서점은 1930년대 종로 서점가에서 최고의 매출을 올리던 박문서관이었다. 박문서관의 주인 노익형은 적수공권으로 어린 시절부터 종로 육의전과 남대문 시장에서 사환이나 거간 노릇을 하다가 1907년경 상동(尙洞) 예배당(지금의 회현역 근처) 앞에서 서적업을 시작한 인물이다.

박문서관의 전성기는 1925년경 종로 2정목(종로 2가)으로 점포를 이전하면서 시작된다. 1930년대에는 대동인쇄소를 인수하여 인사동에 인쇄공장을 신축하고, 본사 신사옥도 새로 지었다. 신사옥은 2층 양옥의 건물로 1층은 50평 규모의 서점, 2층은 출판사 편집실로 사용했다. 박문서관은 서점, 출판사, 인쇄소를 다 갖춘 출판·서점 기업이었던 셈이다.

박문서관의 주력 상품은 『춘향전』, 『심청전』 같은 활자본 고소설(속칭 ‘이야기책’)과 신소설류였다. 1935년경 『삼천리』의 조사에 따르면, 박문서관이 지방에서 주문을 받아 파는 고소설은 1년에 3~4만 부, 신소설은 2만 부 이상이 팔렸다 한다. 이는 박문서관의 다른 스테디셀러, 예컨대 이광수의 『무정』 판매량 3~4천 부를 훨씬 뛰어넘는 수치다. 종로의 큰 서적상이 찍어내는 수많은 신구 소설들은 시골 장터와 지역 서점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1930년대에 박문서관 외에도 종로2가의 영창서관과 덕흥서림, 견지동의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조선인 측 대출판서사(大出版書肆)’로 이름이 높았다.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종로 서적업계의 명맥을 이어간다. 한국전쟁의 격동기를 거친 후에도 출판사, 인쇄소, 서점이 다시 모여든 곳은 다름 아닌 종로였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이용희 출판문화사 연구자·성균관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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