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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버라드 칼럼

북한의 9·19 합의 파기와 ‘지정학적 지뢰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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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지난 몇 주간 한반도 안정을 위협하는 악재가 많았다.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가 있었고, 9·19 군사합의 파기 발표도 있었다. 북한 매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정찰위성이 보내온 사진을 살펴봤다고 주장하지만 사진을 공개하지는 않아 뭔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북한 정권은 발사 성공을 주장해야 하는 상황이다. 3차 발사에서도 실패했다면 국제적 망신일 뿐만 아니라 북한 내부에서도 파장이 컸을 것이다. 정찰위성 발사를 위한 야심으로 김정은은 1000대가 넘는 무기 컨테이너를 러시아에 보내 북한 무기 재고는 거의 바닥나다시피 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재원을 군 장비나 훈련을 위해 쓰기보다 핵무기에 쏟아붓는 것을 우려하는 북한 장성들은 실망했을 것이다. 어떤 종류든 성공 스토리가 필요한 북한 정권은 이번 발사를 내부에서 정치적으로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거리 자축 행사를 발표했는데 이는 2018년 이후 처음이다.

군사정찰위성은 안보 불안 요인
북한은 내부불만 돌릴 카드 필요
비무장지대 우발충돌 위험 커져

에버라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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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발사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은 지난 22일 9·19 군사합의가 규정한 군사분계선(MDL) 상공 비행금지를 해제했다. 바로 다음 날 북한은 아예 9·19 군사합의 파기를 선언했다. 한국에서도 9·19 군사합의 파기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컸다. 이런 주장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자칫 북한의 오판으로 인한 반발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급속하게 악화할 수 있다. 따라서 9·19 군사합의의 완전한 파기보다 북한의 추가 도발이 있을 때마다 합의 내용 일부를 하나씩 효력 정지시키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의 인공위성이 제대로 작동되고 또 충분한 촬영 반경을 확보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인공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된다면 북한의 인공위성 역량과 남북한 군사합의 파기가 한반도 안정에 어떠한 영향을 줄까.

우선, 이번 발사 이전부터 정찰위성이 한반도 안정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적국들이 북한을 공격할 준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북한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 북한 정권은 미국과 한국이 북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갖고 대부분의 정책을 수립한다. 따라서 설령 정찰위성을 통해 미군과 한국군이 공격이 아닌 방어를 위한 진용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더라도 북한은 아마 적국이 정찰위성을 속이고 있다고 추측할 것인데, 이는 북한 정권의 망상을 덜어주기보다는 증폭시킬 가능성이 크다.

둘째, 북한은 핵·미사일 프로그램이 순수한 방어적 목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 정보 분석에 따르면 단순한 방어적 목적이 아닌 공격용일 수 있다. 미국 측 분석대로라면 정찰위성을 통해 목표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위협할 수 있는 북한의 역량은 한반도 안정 증진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북한이 한국에게서 뭔가를 얻어낼 위협 수단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북한의 9·19 군사합의 파기는 한반도 안정을 저해할 것이 분명하다. 9·19 군사합의가 효력을 잃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 한반도 안정 유지에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완전 파기됨에 따라 비무장지대에서 우발적 사고의 위험이 커졌다. 지난 23일 성명에서 북한이 밝힌 대로 중화기를 비무장지대로 반입하고 단거리에서 도발을 감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암울하고 단기적으로는 위험한 대북 전망이 가능하다. 북한 정권은 장기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에 계속 의지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북한 내부의 불만이 커지면 정권의 명운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빈곤 및 식량 불안정, 커지는 남북한의 경제 격차와 또 다른 위기에서 북한 내부 불만이 더 악화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은 상황을 반전할 뭔가가 필요하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안정이 아니다. 북한은 현재 상황을 교란할 무엇이 필요하다.

따라서 향후 몇 개월 대북 관계 관리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북한은 정찰위성 발사 성공으로 득의만만함과 동시에 직면한 여러 문제로 불안할 것이다. 과거 사례를 보면 북한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안타까운 실수를 많이 했다. 9·19 군사합의 파기로 북한이 비무장지대에 지뢰를 다시 설치하겠지만, 동시에 한반도는 지정학적 지뢰밭을 피할 수 없게 됐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