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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수사 장기화, 재판 적체 위험 수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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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종민 변호사·전 광주지검 순천지청장

김종민 변호사·전 광주지검 순천지청장

2021년 9월 기소된 충북동지회 간첩단 사건의 1심 재판이 26개월째 표류하고 있다. 반복되는 법관 기피 신청, 변호인 교체, 국민참여재판 신청 등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1심 구속 기간 6개월이 지나면서 구속된 피고인들은 보석으로 모두 석방됐다. 창원간첩단 사건도 사정이 비슷하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1심 선고에 38개월이 걸렸고,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 개입사건은 기소된 지 무려 3년10개월 만에야 선고됐다.

느리고 비효율적 형사사법 체계
낡은 형사 증거법과 절차에 발목
사건처리 빠른 프랑스 모델 주목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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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형사사법 제도가 중병이 들었다. 국가와 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지만,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 검찰과 경찰의 수사 장기화, 법원의 재판 적체는 적정 수순을 넘은 지 오래다. 문재인 정부 시절의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고소 사건이 1년이 넘도록 처리되지 않는 경우가 흔해졌다. 1심 형사 합의 사건 중 2년 이상 장기미제 건수는 2017년 398건에서 2021년 735건으로 약 80% 급증했다.

상황 악화 배경엔 제도적 이유도 크다. 변호인이 참여한 검사 작성 피의자 신문조서도 피고인이 법정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휴짓조각이 된다. 참고인 진술 조서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법정이 수사기관처럼 변했다. 방어권 보장을 위한 제도가 사법정의 실현을 방해하려는 힘 있는 범죄자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했다는 탄식이 들린다.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일류국가로 가는 밑바탕에 형사사법 제도가 있다. 형사사법의 제1 사명은 범죄로부터 사회를 지키는 것이다. 지금은 마약 범죄가 통제 불능 상황에 빠졌고 1조5000억원의 피해가 발생한 라임 사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좋은 형사사법 제도는 시대를 반영하고 효율적이어야 한다.

대형 비리 의혹이 터져 나올 때마다 신속한 검찰 수사로 처벌하라는 목소리가 높지만, 검찰은 만능이 아니다. 범죄는 빠르게 첨단화하는데 형사사법 제도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가와 국민 몫이다.

변화된 범죄 환경에 맞춘 수사와 형사 재판 절차의 혁신을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신속 재판 절차의 전면 도입이다. 막힌 하수구를 뚫기 위해서는 한정된 사법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정식 재판할 가치가 있는 사건만 공판중심주의 방식으로 처리해야 한다.

예컨대 프랑스는 1983년 ‘즉시 기소 절차(Comparution immediate)’를 도입해 충분한 증거와 함께 체포되고 양형 결정만 남은 사건의 경우, 자백한 현행범을 24시간 이내에 1심 재판을 거쳐 교도소에 수감하고 있다. 2004년에는 ‘미리 유죄를 인정한 경우의 소추 절차(CRPC)’란 이름으로 미국식 ‘플리 바기닝(유죄협상)’ 제도를 전면 도입했다. 전체 형사합의 사건의 약 60%를 이런 신속절차로 처리한다.

둘째, 중대 범죄에 대한 특별수사 및 재판 절차를 마련하고 형사 증거법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국가안보, 첨단기술 유출, 경제 범죄, 마약 범죄 등 중대 범죄에 대해 일반 범죄와 구분해 특별수사재판 절차를 완비한 프랑스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수사 조직의 전면 개편이 필요하고 사법 정의 실현에 최대 걸림돌인 후진적인 형사 증거법 개혁도 시급하다. 방어권 남용을 못 하도록 ‘사법 방해죄’ 도입도 검토해야 한다.

한국의 형사 사법은 국적 불명의 공판중심주의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에 빠져있다. 낡은 형사 증거법과 절차에 발목이 잡혀 있다. 불구속 수사는 결코 원칙이 될 수 없다. 유럽인권재판소 판례로 확립된 ‘공정한 재판의 원칙’만 보장된다면, 사법 통제 하의 구속은 문제 될 것이 없다. 문제는 정부다. 형사사법 개혁을 통한 공정한 법 집행이 110대 국정과제 중 하나이지만 ‘검수(검찰수사권) 원복’을 위한 시행령 개정 외에 뚜렷한 성과가 없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6개월이 지났지만, 법무부에 ‘형사사법 개혁위원회’가 가동됐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내년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해도 즉시 입법할 수 있는 준비된 법안이 없다. 장관은 정책과 법안으로 말해야 한다. 형사사법 제도와 국가 공권력의 유일한 사명은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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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민 변호사·전 광주지검 순천지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