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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노란봉투법’ 강행은 다수의 횡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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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대환 인하대 명예교수·전 고용노동부 장관

김대환 인하대 명예교수·전 고용노동부 장관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제1야당 주도로 발의된 뒤 8년을 끌어오던 노동조합법 개정안이 지난 9일 국회를 통과했다.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개정안은 합법 파업의 범위를 확대함과 동시에 불법 파업으로 인한 기업의 손해에 대한 배상 소송을 제한하고 어렵게 한다. 또 사용자의 개념을 확대해 하청 노조와의 교섭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에 반대해온 여당은 의원 전원이 불참하며 법안 통과를 막아보려 했지만, 다수결의 원칙 앞에 무력감만 보인 채 오로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기대고 있는 형편이다.

야당이 수의 힘으로 밀어붙여
민주사회 노사대등 원리 역행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해야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대통령실은 국회에서 충분한 논의 없이 본회의에 바로 회부돼 일방적으로 처리된 점을 지적하면서 거부권 행사를 시사한 상태다. 노동계는 통과 이틀 뒤에 대규모 집회를 열어 거부권 행사를 못 하도록 압박하고 나섰다. 사회적 대화에 복귀하겠다고 선언한 한국노총마저도 이 투쟁을 계속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제1야당은 그들의 집권 시기에는 통과시키지 못했던 법안을 오로지 다수 의석을 무기로 밀어붙여 ‘폭탄 떠안기기’에 성공하더니 대통령의 거부권 무력화마저 운위하고 있다. 다소 목소리는 낮아졌지만, 내년 총선에서 200석을 획득해 입법 폭주를 하겠다는 제1 야당 인사의 호언은 대통령의 거부권을 넘어 공동체의 ‘일반 의지(General will)’에 대한 협박으로 들린다.

여기에서 필자는 다수결의 원리를 소환할 필요성을 느낀다. 영국의 계몽사상가 존 로크의 『사회계약론』에 근거한 다수결의 원칙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국가가 일체(一體)로 나아가기 위한 편의적인 규칙이다. 국가가 나아가는 방향은 구성원들의 동의로 결정되는데, 현실적으로 만장일치가 불가능하므로 다수의 동의가 가장 커다란 힘으로 이끌게 된다는 것이다. 로크의 사회계약론을 비판한 대륙의 계몽주의자들마저도 다수결 원칙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기술적인 방안으로서 다수결의 대전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한 구성원들 사이의 충분한 토론이다. 단순히 다수의 커다란 힘, 즉 숫자에 압도된 결정은 형식적으로는 다수결일지 모르나 그 기본원리에서는 크게 벗어난 것이다. 비록 기본원리에 충실한 다수결일지라도 반드시 최선의 선택이 아닐진대 원리에 벗어난 다수결에 대해선 더 말할 것도 없다.

노동조합법 개정안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한 토론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근대 민주사회의 기본원리를 거역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노조의 교섭권과 파업권은 대폭 확장하면서 사용자의 재판청구권은 사실상 부인하는 것은 자유와 평등의 원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성문법인 대한민국 헌법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기업별 노조 체제에서 의무 없는 교섭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노사대등의 원칙은 물론 자유와 평등의 원리에도 어긋난다. 거부권 행사의 사유에 이 점을 분명히 적시할 것을 주문한다.

근대 민주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의 원리는 자유계약으로 발현되며 이는 ‘신분에서 계약으로 이행’한 결과다. 노사관계 역시 신분(계급)관계에서 계약관계로 이행한 것이 근대 민주사회다. 한국 사회에서 노조는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여전히 계급론적 발상에 근거해 계약의 범주를 넘어 노조에 편중된 권한과 면책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다수의 횡포는 거부해야 마땅하다.

양곡관리법과 간호법에 이어 이미 거부권 행사가 예고돼 있던 방송법과 함께 이번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키고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압박하는 것은 다수에 의한 집단 괴롭힘이다. 동시에 거부권 프레임을 뒤집어씌우고자 하는 속 보이는 정략에 불과하다. 명색이 제1야당인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이후엔 “입법까지 했으니 이제 거부권을 무력화할 수 있도록 총선에서 표를 달라”고 노동계에 구걸한다면 이는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노동계도 정체성을 회복하길 바란다. 권리는 책임에 비례한다. 진정으로 하청 근로자의 처우 개선을 원한다면, 조직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원청과 하청을 아우르는 조직으로 노조를 개편해 단일 교섭에 나서는 연대의 정신을 발휘하라. 이것이 노동계가 진일보하는 길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대환 인하대 명예교수·전 고용노동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