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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움직이는 사회보장제도”…감독이 말하는 ‘어른 김장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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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진주에서 한약방을 하며 지역 사회와 어려운 학생을 후원해온 김장하 선생을 조명했다. [사진 MBC경남]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진주에서 한약방을 하며 지역 사회와 어려운 학생을 후원해온 김장하 선생을 조명했다. [사진 MBC경남]

‘꼰대’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시대, ‘어른’이란 제목부터 눈에 띈다. 지난 15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 김장하’(감독 김현지)는 경남 진주에서 한약방을 하며 평생 지역 사회의 문화예술인과 여성·인권 단체, 형편이 어려운 학생 등을 후원해온 김장하(79·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선생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이 가난 탓에 못 배운 한을 전재산을 털어 고등학교를 지은 걸로 달랬다. 그리고 1991년 그 학교를 110억원 가치의 건물·땅과 함께 국가에 헌납했다. 그에게 장학금을 받은 학생은 문형배 헌법재판관을 비롯해 서울대 출신 과학자, 의대교수 등 1000명은 족히 넘는다. 오죽하면 “살아 움직이는 사회보장제도”(김현지 감독)란 별명이 붙었을까. 정작 자신은 헤진 양복을 입고 같은 소파와 찻잔을 수십년간 쓰는 등 검소함이 몸에 뱄다.

언론 인터뷰는 물론 상도 거절해온 탓에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선행을 지역 언론인 김주완(59) 기자(전 경남도민일보 국장)가 30년 시도 끝에 4년 전부터 취재, MBC경남 PD 김현지(42) 감독과 함께 다큐로 완성했다. 지난해 말 MBC경남에서 첫 방영해 입소문을 탄 뒤 올 설 연휴 전국 방송됐고, 지역 방송국 다큐론 드물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교양작품상을 받았다. 극장판 개봉 후엔 “이런 어른이 있다는것만으로 따뜻하다” “나 자신은 세상 헛살았구나 생각에 부끄러웠다”(이상 CGV·메가박스 예매앱 관람평) 등 호평이 잇따른다. “돈은 똥과 같아서 모아두면 구린내가 나고 흩어버리면 거름이 된다” “(한약업을 하며)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 등 선생의 어록도 화제다. 지난해 12월 김주완 기자가 펴낸 취재기 제목도 그의 입버릇에서 따온 『줬으면 그만이지』(피플파워)다.

(왼쪽부터) 다큐에 출연한 김주완 기자와 김장하 선생, MBC경남 PD 김현지 감독이다.

(왼쪽부터) 다큐에 출연한 김주완 기자와 김장하 선생, MBC경남 PD 김현지 감독이다.

극장판 개봉 다음날 서울 용산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현지 감독은 “창원MBC가 통합되며 진주로 옮겨온 뒤 2019년 우연히 ‘김장하’라는 낯선 이름과 믿지 못할 선행에 대해 들었다”면서 “이런 사람이 진짜 어른이구나, 생각했기에 다큐의 첫 기획서 제목부터 ‘어른 김장하’였다. 널리 알리고 싶어서 처음부터 극장판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고 했다. 이어 “지역민들도 뿌듯해 하신다”며 “다큐를 보고 왠지 모르게 위로받고 우는 관객이 많다”고 전했다.

취재팀에게 김장하 선생이 내건 조건은 ‘절대 본인을 우상화하지 말아달라’였다고 한다. 선생이 카메라 앞에 여간해선 앉지 않아, 출퇴근길로 불편한 걸음을 성실히 옮기는 모습을 뒤쫓듯 촬영했다. 선생이 직접 말하는 ‘오디오’가 부족해 약 짓는 손님 전화받는 목소리까지 동원해 넣었다. 다큐에 흔히 넣는 본인 인터뷰, 생애사 요약이 빠진 이유다.

김 기자의 취재로 밝혀진 그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1944년 경남 사천 가난한 집안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 졸업 후 1959년 한약방 점원으로 취업했고, 1962년 독학으로 한약종상 시험에 합격해 성년의 나이가 된 이듬해 면허증을 받았다. 같은해 사천에 연 한약방은 갓 스무살 원장이 실력 좋고 정직하단 소문이 나 전국에서 손님이 밀려왔다. 많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아낌없이 베푼 그의 철학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다. 불학에서 기대 없이 베푸는 것을 뜻한다. 다큐에 나온 장학생 출신 김종명씨가 “선생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 했더니 선생이 그러더란다. “그런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진주시는 지난해 5월 문을 닫은 남성당 한약방 건물을 복합문화공간 ‘진주 남성당교육관’으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내년 개관이 목표다. 은퇴 후 김장하 선생은 아내와 4남매, 손주들과 함께 평범한 할아버지로 돌아갔다고 김 감독은 전했다. 그는 “자기 연민을 내려놓고 그 빈자리에 다른 사람을 연민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비로소 어른의 시작점에 선다는 걸 김장하 선생에게 배웠다”고 말했다.

극장 개봉 후 ‘어른 김장하’는 독립영화 ‘마의 고지’로 통하는 1만 관객을 엿새 만에 돌파했다. 26일까지 누적 관객 수는 1만7000여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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