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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숨지자 소주 20박스 샀다…죽으려던 시인 살린 '뜻밖 귀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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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린 옷을 몇 년째 쳐다만 보는 건 너의 향기가 남아서다. 행여 날아갈까 봐 비닐로 덮은 건 아는지….”
‘아내에게 3’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시에는 아내를 잃은 시인의 슬픔이 묻어난다. 20여년 만에 재등단한 윤영환(51) 작가가 쓴 것이다. 그의 여러 시에는 곁에 없는 아내를 향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윤 작가가 못 견디는 그리움을 밖으로 표현하며 버티게 된 건 그래도 기적 같은 일이다. 그는 7년 전 혈액암으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독한 술에 빠져 지냈다. 윤 작가는 “모든 걸 배달로 시켰고 집 밖으로는 아예 안 나갔다. 소주를 20박스 사다 두고 그렇게 매일 술만 마시며 살았다”고 떠올렸다.

 극단선택까지 계획한 그를 성당 지인이 발견해 “이대로 두면 젊은 사람 하나 가겠다”며 행정복지센터에 신고했다. 당시 복수가 차고 다리에 부종이 심한 등 한눈에 봐도 그는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 윤 작가는 병원행을 강하게 거부했다.

동 행정복지센터 사회복지사와 시 고난도사례관리팀 사례관리자가 포기하지 않고 그를 계속 찾았고 글쓰기를 좋아한단 사실을 알게 됐다. 사례관리자는 시청 소식지 등 글쓰기 일감을 주며 라포를 쌓기 시작했다.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긴 했지만 윤 작가는 여전히 “이렇게 사는 삶은 의미가 없다”며 완강하게 버텼다. 어느 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윤 작가를 사례관리자가 응급실로 데려가면서 사실상 강제로 치료가 시작됐다. 알코올성 간경변에 신부전까지 있었다.

 윤영환 작가가 한림대동탄성심병원 시화전 개최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동탄성심병원

윤영환 작가가 한림대동탄성심병원 시화전 개최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동탄성심병원

 병원에선 의료사회복지사가 나섰다. 이송월 한림대학교동탄성심병원 의료사회복지사는 “처음에는 그냥 죽을 거니 내버려 놔두라고 하셨는데 보호자 등 지지 체계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라며 “환자 보호자로 의사와의 소통을 지원하는 것부터 시작해 간병인 연계, 보험 청구 등 의료비 지원을 도왔다”고 말했다.

 이송월 복지사는 지자체 사례관리자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를 기억해 어느 날 윤 작가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을 그에게 선물했다. 윤 작가는 “저를 살려보려고 여러 사람이 도왔다. 그 마음이 고마워 다시 한번 글을 써보자고 생각했고 만년필 선물을 받은 뒤 더 용기를 내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윤 작가는 지난해 시사문단을 통해 시인 및 수필작가로 재등단했다. 학창시절부터 글쓰기에 남다른 재주가 있던 그는 20대에 한 번 등단한 적이 있다.

윤영환 작가가 쓴 시가 한림대동탄성심병원 본관 로비에 전시돼 있다. 사진 동탄성심병원

윤영환 작가가 쓴 시가 한림대동탄성심병원 본관 로비에 전시돼 있다. 사진 동탄성심병원

 올해 틈틈이 습작한 작품을 응모해 신춘문예 등 상도 많이 탔다. 한림대동탄성심병원은 병원에서 치료 받으며 등단한 윤 작가와 또 다른 이재성(50) 작가의 작품을 본관 1층 로비에 전시하는 ‘We路(위로)시화전’을 열고 있다.

 윤 작가를 살린 건 지역사회통합돌봄(커뮤니티케어) 덕이 크다. 지자체와 병원이 협력해 환자의 의료·돌봄을 지원하는 것이다. 퇴원 후 보호자가 없거나 거주할 곳이 마땅치 않을 때 필요한 서비스를 병원이 의뢰하면 지역 복시기관이 맞춤형 지원을 제공한다. 윤 작가도 청소, 반찬 서비스, 교통약자 이동지원 서비스 등을 받았다. 그를 돕기 위해 관련 기관만 10곳이 참여했다.

 이송월 복지사는 “지역 대표병원으로서 지역과 같이 협력해 2019년부터 사각지대 의료취약계층 환자 약 400명을 이렇게 관리해왔다”라며 “윤 작가는 그중에서도 고난도 사례였지만 여러 기관이 손발을 맞춰 재활에 성공한 사례”라고 말했다. 그는 “환자의 재활은 그 과정에 참여한 모든 사회복지사들의 기쁨”이라고 했다.

한림대동탄성심병원에서 열리고 있는 시화전. 이번 시화전에는 치료받다가 작가로 등단한 두 명의 작품이 전시됐다. 사진 동탄성심병원

한림대동탄성심병원에서 열리고 있는 시화전. 이번 시화전에는 치료받다가 작가로 등단한 두 명의 작품이 전시됐다. 사진 동탄성심병원

 윤 작가는 3년 전부터 금주하며 새 삶을 살고 있다.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로 열심히 치료받고 있으며 소설을 써보려고 준비 중이다. 윤 작가는 “정다운 사회복지사들이 아니었으면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라며 “이런 사회복지사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미소는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최고의 처방전”이라며 “이번 시화전을 통해 질병과 싸우는 많은 분들이 미소와 함께 살아가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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