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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하려면 빽 쓰라는건가"…'사건 브로커'에 뒤숭숭한 경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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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되고 ‘인맥 중요하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는데, ‘빽’ 쓰라는 말이었나”(서울 일선 경찰서 A 경장)

내년 2월 정기 인사를 앞두고 승진 심사에 대한 경찰 내 불신이 커지고 있다. 광주지방검찰청의 ‘사건 브로커’ 수사 중 불거진 경찰 인사 청탁 의혹의 여파다. 지난 15일 극단적 선택을 한 고(故) 김모 전 치안감은 2021년 1월 경찰 공무원 5명으로부터 승진 청탁금 총 1억500만원을 받기로 약속하고, 그중 9000만원을 실제 수수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다. 김 전 치안감에게 돈을 건넨 의혹을 받는 현직 경찰 중 일부는 실제 경감에서 경정으로 진급했다.

아직 수사 결과가 나온 건 아니지만, 관련 소식이 퍼지며 경찰 내부는 뒤숭숭하다. 경찰 승진 경로는 크게 심사승진, 시험승진, 근속승진, 특진 등으로 분류된다. 경감 계급까지는 일정 이상 근무하면 근속승진이 가능하지만, 중간 간부인 경정 계급부터는 시험과 심사승진이 주를 이룬다. 심사승진은 근무성적 평점을 근거로 각 시도청과 경찰서 인사위원회에서 승진 대상자를 선발하는 방식이다. 서울 지역 경찰서에 근무하는 한 경찰관(경사)은 “중간 간부까지 승진하려면 결국 일을 잘하는 게 아니라 줄이나 잘 서야하는건가 싶어 허탈하다”고 말했다.

23일 오전 전남 무안군 삼향읍 전남경찰청 인사계 사무실에서 검찰 수사관이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고 있다.   '사건 브로커'가 금품과 향응을 제공하고 경찰 승진인사 등을 청탁한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은 이날 전남경찰청과 소속 경찰관 일부를 압수수색했다. 사진 연합뉴스

23일 오전 전남 무안군 삼향읍 전남경찰청 인사계 사무실에서 검찰 수사관이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고 있다. '사건 브로커'가 금품과 향응을 제공하고 경찰 승진인사 등을 청탁한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은 이날 전남경찰청과 소속 경찰관 일부를 압수수색했다. 사진 연합뉴스

인사권을 가진 고위급 경찰들도 신경이 곤두서있다. 서울의 한 일선 서 서장은 “뒤숭숭한 분위기인 것은 사실”이라며 “논란이 부담스러워서 직원 면담 요청조차 거절하는 서장들도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경찰서 서장도 “광주 건처럼 돈이 오가는 경우는 이례적이지만, 추천을 빙자한 청탁도 있어 조심스럽다”고 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지난 17일 내부망 글을 통해 “특진·승진심사 등에 있어 공정성과 도덕성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각급 관서장 등에게 각별한 주의를 당부하기도 했다.

심사승진 공정성·투명성 시험대…경찰청 “심사승진 확대 그대로”

경찰청 역시 난감한 상황이다. 심사승진을 확대하겠다는 기조를 밝힌 상황에서 대형 인사 청탁 사건이 불거진 탓이다. 경찰청은 지난 8월 ‘경찰공무원 승진임용 규정’을 일부 개정해 경정 이하 계급 심사승진 비율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시험승진은 축소하기로 했다. 현행 50%인 심사 승진 비율을 2025년에는 60%, 2026년에는 70%까지 늘리겠다는 것이다. 시험승진에 대한 현장의 위화감과 불만 여론을 반영하고, ‘열심히 일한 사람’을 더 많이 승진시키겠다는 취지다.

'사건 브로커' 인사청탁 의혹이 확산되면서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경찰로 추정되는 직원들이 심사승진 공정성을 문제삼는 글이 연일 게시되고 있다. 사진 블라인드 캡처

'사건 브로커' 인사청탁 의혹이 확산되면서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경찰로 추정되는 직원들이 심사승진 공정성을 문제삼는 글이 연일 게시되고 있다. 사진 블라인드 캡처

실제 심사승진 확대 기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도 많다. 한 경찰서 수사과장(경정)은 “근무 시간에 독서실에 가는 등 시험 준비를 하느라 본업을 게을리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조직 내 위화감을 조성하는 시험승진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팀장급 경찰관 역시 “주관이 많이 개입되는 지휘관 평가 비중을 낮출 필요는 있지만, 심사승진 비중을 늘리는 방향 자체는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 청탁 의혹과 같은 논란에서 벗어나 다수의 지지를 얻으려면, 공정성과 투명성 확보라는 산부터 넘어야 하는 상황이다. 심사승진은 근속기간, 사격과 무도 실력, 교육 이수 여부 등 객관 점수와 상급자의 근무성적 평정을 합쳐 승진이 결정되는데, 정성평가 항목이 많아 공정성 시비가 잦은 편이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 등에선 이미 이번 사건과 심사승진 확대을 연관지어 비판하는 경찰관들의 글이 잇따른다. “시험 축소하고 심사 확대하는 이유 다 나왔네”, “돈 주고 심사 오간다니까 요즘 시대 어쩌고 하던 애들 생각난다”와 같은 내용이다.

게다가 탈주범 김길수 검거 특진의 기준을 두고 내부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경찰청은 “논란 소지가 전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지난 6일 김길수를 검거한 의정부경찰서 김모 경사는 22일 경찰 내부망에 형사과 내부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특진 대상이 검거조에서 감시조로 뒤바뀌어 부당하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탈주범을 잡는 것은 로또에 비유할 수 있는 크나큰 행운이자 영광인데, 탈주범을 잡고도 계급장을 못 달고 다른 팀에 강취당하는 것은 로또보다 더 큰 확률”이라면서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현직 경찰이나 전문가들은 간부 승진 경쟁이 극도로 치열해 청탁 유혹도 동시에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심사승진과 특진 과정의 투명성을 제고하지 않으면 비슷한 논란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지난해 경감과 경정 총인원은 각각 1만8958명, 3131명이었다. 이중 경정 승진에 성공한 경감은 248명(1.3%), 총경이 된 경정은 135명(4.3%)에 불과했다. 지방청 근무 경험이 있는 한 경정은 “지방은 총경은 고사하고 경정 승진 가능자도 총 2~6명 뿐이라 인사 청탁 유혹이 더 클 것”이라며 “승진 과정이 공정하고 투명해야 유혹을 원천차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총경 출신 박상융 변호사는 “심사승진의 경우 5배수 안에 든 승진대상자 사이에선 상급자의 주관 평가가 결과를 가른다”며 “객관 점수 비중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경찰청 관계자는 “인사에서 정성평가가 개입되는 건 경찰 뿐 아니라 타 조직 어디든 마찬가지”라며 “실무 능력을 중점 평가하는 심사승진을 확대하는 큰 기조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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