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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석무의 실학산책

사람다운 사람, 나라다운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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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석무 다산학자, 우석대 석좌교수

박석무 다산학자, 우석대 석좌교수

예나 지금이나 글자를 아는 사람은 사람 노릇을 하기가 어렵다. 사람과 다른 동물, 혹은 식물의 차이점일 수도 있겠다. 글자와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동·식물은 나라가 잘되면 무엇하고, 또 세상이 잘못된들 무슨 근심과 걱정을 하겠는가. 한데 오직 인간은 글자로 된 책을 읽을 수 있기에, 즉 공부를 하기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있고, 자기가 살아가는 나라나 세상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글자를 아는 사람은 곧잘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따지게 된다. 글자를 모르고 사는 사람보다 사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나라 읽고 자결한 황현의 절개
윤리와 풍속을 강조한 정약용
거짓말 일삼는 요즘 정치인들
우리는 대체 어디고 가고 있나

실학자가 강조한 ‘국비기국(國非其國)’

전남 광양시 봉강면에 있는 매천 황현의 생가 내부 모습. [사진 광양시청]

전남 광양시 봉강면에 있는 매천 황현의 생가 내부 모습. [사진 광양시청]

1910년 가을, 조선이라는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수많은 지사가 망국의 비통함에 빠졌다. 이때 호남의 구례에 살던 56세의 큰선비요 대시인이던 매천(梅泉) 황현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면서 ‘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 사람으로서 글자나 아는 사람 되기가 어렵기도 하구려!)라는 탄식의 유시를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고 말았다.

그가 글자도 몰라 나라와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조선이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죽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가 망했는데 선비가 멀쩡하게 살아있어서야 되겠느냐는 분노를 터뜨렸고, 급기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절의를 택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간이란 나라와 세상에 대한 근심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뜻을 우리에게 알려준 사람 중 한 명이 매천이었다.

옛날 책을 읽다 보면 ‘국비기국(國非其國)’이란 용어와 자주 마주친다. ‘나라이면서도 나라가 아니다’라는 뜻인데, 모양만 나라이지 나라다운 나라가 아님을 안타까워하는 표현이다. ‘국비기국’은 조선 후기 실학을 일군 반계(磻溪) 유형원, 성호(星湖) 이익, 다산(茶山) 장약용 같은 학자들의 글에도 다수 등장한다. 그 의미를 한 번쯤 곱씹을 필요가 있다.

특히 다산은 ‘국비기국’을 명쾌하고 간절하게 설명해준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이유는 기본 윤리를 갖추고 있어서이고, 나라가 나라다울 수 있는 이유는 풍속의 교화를 소중하게 여겨서이다. 이런 점이 없다면 사람은 사람답지 않게 되고 나라는 나라답지 않게 될 것이다”(人之所以爲人者 以具倫彝也 國之所以爲國者 以重風化也 無是則其將人不人而國不國矣. 『흠흠신서』 중에서)고 일갈했다.

위 문장에서 ‘윤이(倫彝)’는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한 기본 윤리를 가리킨다.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말이다. 다산은 또 나라가 나라가 되는 조건으로 풍화(風化)를 지목했다. 풍속의 교화, 즉 세상 사람이 모범적인 지도자를 본받고, 교육을 통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화되어야만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 교육, 사회 교육, 도덕 교육 등의 교화 정책을 제대로 세워 인간이 인간다운 인간으로 교화되어야만 나라다운 나라는 되어갈 수 있다는 뜻이니, ‘풍속의 교화’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불변의 과제임을 새삼 깨우치게 된다.

하지만 요즘 우리나라가 돌아가는 양상을 보면 그와는 정반대인 것 같다. 교화한 세상과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큰 걱정이다. 동양고전 『중용』에 ‘불성무물(不誠無物)’이라는 말이 있다. ‘성(誠)’이 아니고는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뜻인데, 여기에서 ‘성’은 바로 거짓 없는 진실이고 정성이다.

『중용』의 가르침 ‘불성무물(不誠無物)’

그렇다. 진실과 정성이 없고서야 어떤 사물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진실과 정성에서는 멀어져 가고 있다. 그 반대인 거짓과 속임만 가득한 시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특히 나라의 지도층인 고관대작들이 더욱 그렇다. 말을 해놓고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일이 이제는 너무 흔해졌다. 어떤 말이 문제가 되면 사실 그 말은 이런 뜻이었다고 해명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냥 그런 적 없다고 해버리니 대체 어쩌란 말인가. 실제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요즘 고관들의 인사청문회나 기자회견 같은 데서 느끼는 답답함이다. 진실하게 대답하는 사람들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진실이 사라진 나라에서 청소년들이 어떤 교화를 받을 수 있겠으며, 국민은 또 어떤 공감을 할 수 있겠는가. 진실은 없고 거짓이 넘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고,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사람다운 사람이 있고, 나라다운 나라에서 살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그러려면 정치부터 달라져야 한다. 나라의 풍속을 교화시키는 일에 최우선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 거짓의 세상에서 진실의 세상으로, 속임의 정치에서 정성의 정치로 돌아와야 한다. 거짓은 순간에야 통할 수 있어도 역시 진실만이 영원히 통한다는 것을 되새겨야 한다.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