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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길어지는데 항소율도 올라…법원 ‘생산성’에 의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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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소송 지연의 경제적 손실

김두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김두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2022년 우리나라 법원에서 종결된 민사소송 1심의 평균처리 기간은 6.2개월이었다. 이는 2021년보다 0.1개월 증가한 것이며,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취임했던 2017년의 5.0개월과 비교하면 1개월가량 늘어난 것이다〈그림1〉.

민사소송 1심에 6.2개월 걸려

민사소송이 제기되었다는 것은 경제주체 간의 다툼으로 인해 어떤 자산이 경제활동에 제대로 활용되고 있지 못하고 있고, 소송당사자들이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겪고 있음을 의미한다. 민사소송 가액, 즉 소송 대상이 되는 자산의 규모는 2022년 기준 총 62조원이다.

재판 지연으로 인한 사회 전체의 경제적 손실도 무시 못할 수준이다. 따라서 소송처리 기간 증가는 재판의 공정성 여부와 아울러 법원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는지 평가하는 데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다.

〈그림 1〉 정근영 디자이너

〈그림 1〉 정근영 디자이너

2022년 민사소송 자산 62조원
소송 지연은 사회·경제 큰 손실

판사 1인당 사건부담 감소에도
재판 장기화·항소율 상승 심각

법원, 임기응변 대응 하지 말고
공정·신속 재판 깊이 고민해야

김명수 전 대법원장 재임 동안 소송처리 기간이 지속적으로 늘었다는 사실은 언론에 꾸준히 보도되는 등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단 이를 김 전 대법원장의 법원 운영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몰라도, 완전히 타당하지는 않다. 소송처리 지연은 김 전 대법원장 재임 동안에 불쑥 등장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사소송 1심 처리 기간은 1980년대 중반부터 지난 40여년 동안 지속해서 증가했고, 그 결과 현재는 1980년대 중엽의 평균 2개월에 비해 3배로 늘어난 수준에 도달했다.

재판 지연과 관련해 김 전 대법원장이 비판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소송처리 기간이 장기적으로 늘고 있다는 심각성을 알지 못했거나, 또는 알면서도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황상 김 전 대법원장이 이 문제를 몰랐을 리는 없다. 알면서도 문제 해결을 위해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필자는 그중에서도 원인 파악을 게을리한 점을 특히 지적하고 싶다.

법원 운영과 관련한 여러 지표를 살펴보면 소송처리 지연은 우리가 쉽게 지목할 수 있는 한두 가지 요인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법원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런 점을 도외시한 채 손쉬운 처방을 내리거나 문제를 숨기기 급급한 탓에 상황이 점점 악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건 수는 2008년보다 30%나 줄어

〈그림 2〉 정근영 디자이너

〈그림 2〉 정근영 디자이너

이런 평가의 근거가 되는 몇 가지 통계를 살펴보자. 첫째는 법원에 접수되는 사건 수다. 소송처리 기간의 지속적 증가는 사건이 늘어나서 판사들의 업무 부담이 증가한 결과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재판이라고 부르는 본안사건을 살펴보면 1980년대 20만건 수준이던 것이 이후 빠르게 증가해 2000년대 중반에는 180만 건에 육박했다〈그림 2〉. 사건 증가는 판사들의 평균 업무 부담을 늘려서 사건 처리의 지연을 야기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추론은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본안사건은 2008년을 정점으로 해서 이후 감소 추세를 보였으며, 2022년에는 2008년보다 30%나 적은 120만 건까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본안사건의 70~80%를 차지하는 민사사건 역시 유사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즉 2010년을 전후로 한 시기 이후로는 민사소송의 절대 숫자가 줄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송처리 기간은 계속 늘어났다.

판사 정원 10여년 전보다 20% 늘어

둘째는 판사 인력 변화다. 1980년 이래로 판사 정원은 계속 증가했으며, 특히 사건 수가 감소한 지난 10여년의 기간 동안 판사 정원은 2500명에서 3000여 명으로 20%가량 증가했다. 아울러 지난 10년 동안은 충원율이 상승해서 사실상 100%에 근접한다〈그림 3〉. 그 결과 판사 1인당 본안 사건 수는 2010년 600건에서 2022년에는 400건으로 크게 줄었다〈그림 4〉.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판사 1인당 사건 부담은 여러 가지 다른 지표를 적용하거나 본안사건 외의 업무부담까지를 고려하더라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림 3〉 정근영 디자이너

〈그림 3〉 정근영 디자이너

〈그림 4〉 김영옥 기자

〈그림 4〉 김영옥 기자

결국 사건의 절대 숫자나 판사당 사건부담이 지속해서 감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 지연이 계속 심화하였다는 뜻이다. 기업으로 치면 일감은 줄어들고 생산인력은 늘어났는데도 생산소요 시간이 늘어난 셈이다. 이는 법원 운영에서 우리가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심각한 문제가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림 5〉정근영 디자이너

〈그림 5〉정근영 디자이너

셋째는 사건처리율 추이다. 한 해 동안 접수된 사건 가운데 종결이 되지 않은 사건들은 다음 해로 넘어가서 계속 심리가 되는데, 이런 사건이 쌓일수록 사건처리 기간이 증가한다. 따라서 사건처리 기간 증가와 사건처리율의 관계는 일종의 거울 이미지이거나 혹은 동일한 현상을 다른 방식으로 측정한 지표와 다를 바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민사 본안사건 처리율은 당혹스러운 양상을 보인다. 지난 40여년 동안 우리나라 민사소송의 처리율은 사실상 100%를 유지해 왔다〈그림5〉. 매해 접수된 사건의 대부분을 처리했거나, 혹은 다음 해로 이연되는 사건 수가 특별히 늘어나지도 않았는데 처리 기간이 계속 길어졌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민사 1심 항소율도 계속 높아져

마지막으로 항소율 추이다. 법원 판결이 얼마나 충실한지 측정하기란 쉽지 않지만, 항소율은 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다. 판결에 대해 동의하기 어려울수록 항소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판사들이 사건을 보다 심도 있게 검토할수록 판결에 대한 동의 수준이 높아지리란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만일 판사들이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기보다 사건을 충실하게 다루는 데 중점을 뒀다면, 항소율은 낮아지고 사건처리 기간은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퇴임사에서 재판지연 문제를 언급하며 “정의의 신속한 실현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가치이지만, 충실한 심리를 통해 정의로운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의 재임 기간 중 일어난 신속성 저하가 사건 심리의 충실성을 강화하다 보니 나타난 결과였다는 답변으로도 읽힌다.

〈그림 6〉 김영옥 기자

〈그림 6〉 김영옥 기자

안타깝게도 항소율 추이는 이런 가능성과 배치된다. 〈그림6〉은 민사소송 1심 가운데 합의심과 단독심 사건의 항소율 추이를 보여주는데, 항소율은 2000년대 중반 10% 수준이던 것이 계속 높아져서 2022년에는 14%에 이르렀다. 결국 지난 10여 년 동안에는 판사들의 업무 부담이 지속해서 줄어들고 있었음에도 판결의 신속성은 물론 충실성까지 악화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재판 시스템 혁신 방안 필요

지난 10여 년 동안 법원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사건의 난이도도 증대되었으며, 국민참여재판 등의 도입으로 인해 판사들은 새로운 업무 방식에 적응해야 했다. 반면 법조 일원화에 따른 채용방식 변화는 판사들의 평균 연령을 높였으며, 탄핵 사태 등을 거치면서 법원행정처는 더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판사들의 성과를 끌어내기 어려워졌다. 나아가 우리 사회가 과거처럼 휴일도 없이 업무에만 몰두하는 것을 더는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고, 법원도 이런 변화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사건처리 지연은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나타난 결과로 봐야 한다.

기업으로 보면 일감(소송)이 늘어났거나 생산인력(판사)이 부족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면 생산성(소송 기간 단축 등)을 높일 방안을 원점에서 찾아야 한다. 판사 역량 제고, 순환근무제 개선 등 혁신책이 필요할 수도 있다. 차분한 분석을 기초로 다각도에서 세심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얘기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법원이 보여준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 사안을 직시하고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문제를 회피하거나 ‘장기미제 중점처리 법관제’처럼 특별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임기응변 대응을 내놓는 것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 왔다. 그 사이 법원의 정치화와 관련해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법원이 수행해야 할 기본 업무를 얼마나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과 고민은 간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수의 사건에 관심이 집중된 사이, 소송 등으로 인해 법원에 가야 하는 국민이 얼마나 충실하고 신속한 재판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정부, 언론, 학계는 물론 법원 스스로 등한시해온 측면이 있다. 새로 취임하는 대법원장은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이라는 법원의 기본 소임을 다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주기 바란다.

김두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