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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곽정식의 삶의 향기

그 많던 땅강아지는 어디로 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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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곽정식 수필가

곽정식 수필가

서리가 내려서 땅콩 가을걷이를 서둘러야 한다며 함께 가자는 지인의 말에 경기도 여주로 나들이했다. 땅콩밭까지는 농로를 제법 걸어야 했다. 한 달 전까지 연노랑을 머금던 평야가 이제는 진노랑 즙을 삼킨 듯했다. 논두렁에선 들풀 마르는 냄새가 진하게 번졌다. 벼잎 위의 메뚜기, 강아지풀에 살포시 몸을 앉힌 고추잠자리를 보니 옛 기억이 불현듯 살아났다.

땅콩밭에 도착하니 하트 모양의 잎과 보라색 줄기를 가진 고구마도 바로 옆 뙈기밭에서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일하던 땅콩밭 주인이 고구마와 땅콩은 옛날 배고팠던 시절 구황작물로 재배했는데, 뿌리가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기 쉬운 모래땅에서 잘 자라 여주를 대표하는 작물이라 소개했다. 또 이 동네 밭은 친환경 농법 덕에 토양이 오염되지 않아 땅강아지도 자주 나타난다고 했다.

여주 땅콩밭서 만난 땅강아지
힘세고 하는 일 많은 땅의 ‘친구’
우리 사회 ‘베이비 부머’ 떠올라
은퇴 세대의 경제 복귀 도와야

삶의 향기

삶의 향기

땅콩 줄기를 당기자 아닌 게 아니라 땅강아지 서너 마리가 딸려 나온다. 딸려서 나온 땅강아지들은 눈이 부시다는 듯 앞발로 사레를 치며 몸을 좌우로 흔든다. 그중 한 마리를 집으니 예나 지금이나 미는 힘이 보통이 아니다. ‘땅(土)’속에 사는 ‘강아지(狗)’인 땅강아지(土狗)가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바로 옆 고구마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땅강아지는 식물 뿌리를 먹어 속이 상하지만 땅을 파 산소를 공급하고 빗물도 잘 스며들게 하니 밉지는 않다고 했다. 또 힘이 세고 공격성이 강한 가물치나 뱀장어 낚시에는 땅강아지를 최고의 미끼로 친다고 한다. 아마도 땅강아지의 왕성한 움직임 때문일 것이다.

길에 포장이 안 돼 온통 흙이었던 시절 아이들은 독이 없는 야행성 곤충인 땅강아지를 잡아서 장난감 삼아 놀았다. 어릴 적 평상에서 저녁을 먹을 때라면 땅강아지는 전등이 있는 평상 쪽으로 다가왔다. ‘나도 좀 끼워줘’라는 듯 말이다. 이는 땅강아지에게 ‘빛을 쫓아가는’ 추광성(趨光性)이 있어서다. 그러던 땅강아지들이 모습을 감추게 된 건 급속한 도시화로 땅이 없어진 탓이다.

필자도 실의에 젖었던 어린 시절 땅강아지를 집어서 아래에서 위로 보기도 하고, 책상 위에 놓고 기어가는 모습도 봤다. 확대경으로도 관찰했다. 확대경으로 들여다본 땅강아지는 온몸이 강아지 털처럼 부드러운 털로 덮여 있었다. 삽날처럼 생긴 종아리는 넓적하고 튼튼해 아주 듬직한 모습이었다.

땅강아지도 검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 듯했다. 땅강아지의 검은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 차 있었다. 땅강아지와 교감하는 일이 소소한 낙이 되자 땅강아지로부터 알게 모르게 힘과 기를 받았다. 그때 세상에는 천기(天氣)만 있는 게 아니라 지기(地氣)도 있다는 걸 실감했다.

땅강아지와의 우정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주말이면 근교에 나가 땅강아지를 찾았다. 땅강아지의 주 거주지는 땅속이고 핵심 역량은 땅 파는 재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재주도 조금씩 있다. 날기도 하고, 기어오를 줄도 알며, 물통 속에 넣으면 앞발을 움직이며 헤엄치기도 한다.

땅속에서 나와 강아지와 같은 발랄함을 보여주는 땅강아지에게 ‘땅’과 ‘강아지’를 합쳐서 작명한 데서 옛사람들의 재치가 느껴진다. 두더지처럼 땅을 파는 땅강아지의 생김새는 귀뚜라미를 닮아서 영어로는 ‘모울 크리킷’이라 한다. ‘모울(mole)’은 두더지를, ‘크리킷(cricket)’은 귀뚜라미를 의미해서다. 땅강아지와 모울 크리킷, 어느 쪽이 더 멋진 이름일까.

땅콩 수확을 마친 후 정영록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여주에서 땅강아지 본 이야기를 했다. 여주처럼 모래가 많은 하동이 고향인 그는 땅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반가운 듯이 나오는 땅강아지를 보면 은퇴한 베이비 붐 세대가 생각난다며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사회에는 전등 빛에 반갑게 다가오는 땅강아지를 연상시키는 ‘베이비 부머’라는 은퇴 세대가 있습니다. 신생아 출산 25만의 인구절벽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은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베이비 부머를 경제활동에 투입해 젊은 세대를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노동력 부족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게다가 베이비 부머는 경제활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요즘 세대들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일한다면 그들은 ‘살기 위해’ 일했다. 참을성이 많은 그들은 영화 ‘인턴’에서 70세에 입사한 주인공이 경륜과 성실로 자리를 잡아나가듯 소정의 인턴 과정만 마치면 ‘산업역군’으로 거듭날 수 있다.

땅콩밭에서 필자가 마주했던 땅강아지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이 이런 말을 하려 했던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혹시 저를 부르셨습니까?” 깊어가는 가을, 오늘도 숨어 우는 바람 소리에 베이비 부머의 장탄식이 섞여 있는 듯하다.

곽정식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