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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인·가족 함께 달린 4.2㎞…"다름을 다채로움으로"

중앙일보

입력

영하 3.8도를 기록한 18일 오전, 서울 상암동 월드컵공원 평화광장에 ‘오티즘 레이스’ 참가자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이 대회는 오티즘(자폐성 장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이다. 10㎞와 함께 4.2㎞ 코스가 포함된 것도 유엔에서 지정한 4월 2일 ‘세계 자폐증 인식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그간 코로나로 인해 각자의 자리에서 달리기를 하고 온라인으로 인증을 하는 형태로 진행해오다 올해 처음 오프라인으로 개최됐다.

서울 강북구에 사는 조범찬(53)·조재혁(19) 부자(父子)는 일주일 전부터 집 근처 우이천을 달리며 이번 레이스를 기다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3월부터 강북구의 한 중학교에서 환경 미화 일을 하루 4시간씩 하고 있다는 재혁씨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등산·사이클 등 운동을 같이 했는데, 오늘도 기대된다”며 들뜬 모습이었다.

발달장애인 체육센터 학생과 교사 25명이 함께 수원에서 대회참가를 위해 온 이들도 있었다. 김동환(9)군은 영하의 날씨에도 “이 정도는 춥지 않다”며 “4.2㎞는 충분히 뛸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김군과 함께 대회를 신청한 아버지 김얼(45)씨는 “아이가 1학년 때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는 ‘검사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특수 교육을 받으면서 적응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복지센터에서 쇼핑백을 생산하는 일을 함께하는 동료 김충완(33)·염중국(27)씨는 “10월까지 맹연습을 해왔다”며 선두로 들어올 것으로 다짐했다.

서울 강북구에서 온 조범찬(53)·조재혁(19) 부자(父子). 자폐성 장애를 가진 재혁씨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운동을 많이 했는데, 오늘 달리기도 같이 할 수 있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김민정 기자

서울 강북구에서 온 조범찬(53)·조재혁(19) 부자(父子). 자폐성 장애를 가진 재혁씨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운동을 많이 했는데, 오늘 달리기도 같이 할 수 있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김민정 기자

오전 10시, 출발시간이 가까워오자 참가자들은 외투를 벗고 유니폼 차림으로 라인에 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다른 레이스와 사뭇 달랐다. 함께하는 데 의미를 뒀던 행사였던 만큼 이날 달리기는 속도를 측정하지 않았다.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자 일부는 스타트 자세를 취하며 빠르게, 다른 이들은 뒤에서 유모차를 끌며 느릿느릿 출발했다. 자녀의 손을 잡은 부모가 자녀의 속도에 맞춰 보폭을 좁히는 광경도 눈에 띄었다. 이날 레이스의 캐치 프레이즈도 “다름을 다채로움으로”였다. 발달장애인을 다룬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지난 4월 백상예술대상 대상을 수상한 배우 박은빈의 수상소감에서 따왔다.

오티즘 레이스에 참가한 한 아버지와 자폐성 장애인 아들의 손을 잡고 달리기를 시작하고 있다. 김민정 기자

오티즘 레이스에 참가한 한 아버지와 자폐성 장애인 아들의 손을 잡고 달리기를 시작하고 있다. 김민정 기자

달리는 중에도 경쟁하는 모습보단 옆 사람과 함께 달리는 모습이 더 자주 관찰됐다. 시큰둥한 표정의 동료 팔짱을 낀 채 경쾌한 발걸음으로 뜀박질을 하는 발달 장애인이 있는가 하면, 복지센터의 자폐성 장애 어린이들을 양손에 한 명씩 붙잡고 격려하며 뛰는 교사도 보였다. 한 장애인 참가자는 또래로 보이는 참가자에게 “이리 오라”며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출발 전 ‘에이스’라 자칭하며 선두로 들어올 거라 예고했던 복지센터 사람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하다 달리기 말미엔 함께 들어와 단체 사진을 찍었다.

숨이 찬 호흡으로 자폐인 아들의 손을 잡은 채 출발지점으로 되돌아온 참가자 김모(58)씨는 “자폐인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행사가 많지 않은데, 같이 참가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라며 “건강과 사회성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경남 통영에서 2대째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박솔마로(28)씨는 “먼 이동이 고되긴 하지만 서울 구경을 시켜주고 싶어 함께 왔다”며 “발달 장애인들 여러 명과 함께 달리느라 속도를 빠르게 내진 못했지만 같이 하는 게 의미 있었다”고 말했다. 이 시설에서 2015년부터 지내온 박형서(27)씨는 달리기 전 무대에 올라 ‘우리의 속도는 조금 느릴 수 있다’ ‘우리도 혼자 할 수 있어요’ 등의 문구를 낭독했다. 박씨는 “문구 낭독도, 같이 하는 달리기도 설렜다”며 웃어보였다.

통영의 발달 장애인 거주 시설에서 전날 올라왔다는 이들은 각자 체력에 맞게 다른 거리를 달렸지만, 마지막엔 한 데 모여 기념 사진을 촬영했다. 시설을 운영하는 박솔마로(28)씨는 “같이 달리느라 속도는 느렸지만, 이제는 가족 같은 친구들과 함께 달리니 의미 있었다”고 말했다. 김민정 기자

통영의 발달 장애인 거주 시설에서 전날 올라왔다는 이들은 각자 체력에 맞게 다른 거리를 달렸지만, 마지막엔 한 데 모여 기념 사진을 촬영했다. 시설을 운영하는 박솔마로(28)씨는 “같이 달리느라 속도는 느렸지만, 이제는 가족 같은 친구들과 함께 달리니 의미 있었다”고 말했다. 김민정 기자

대회를 주최한 한국자폐인사랑협회 김용직 대표는 판사복을 벗은 후 2006년부터 지금까지 회장직을 맡고 있다. 스스로도 83년부터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들과 함께해온 김 대표는 “자폐는 원인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아 많은 부모들이 ‘억장이 무너진다’고 표현할 정도로 어려운 장애”라며 “다름을 다채로움으로 인식하기까지의 과정이 어렵긴 하지만, 달리는 동안만큼은 자폐인들을 인식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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