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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예술 예산 5배로 늘리고 창업지원 나선다... "이 나이에 그것도 못하면 바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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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5호 06면

유인촌 ‘2회차’ 문체부 장관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옥상에 선 유인촌 장관. 그는 과거 문체부 자리였으나 자신이 설립 추진한 이곳에 처음 방문한다고 했다. 김상선 기자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옥상에 선 유인촌 장관. 그는 과거 문체부 자리였으나 자신이 설립 추진한 이곳에 처음 방문한다고 했다. 김상선 기자

믿기 힘들 만큼 누군가 일을 잘할 때 ‘인생 2회차냐’ 묻곤 한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경험의 무게를 웅변하는 말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최장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경력을 보유하고 지난달 최초의 ‘문체부장관 2회차’를 개시한 유인촌 장관에게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장관 지명 전날까지 무대에 섰던 배우가 트랜스포머급 속도로 변신해 과감한 정책개선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건 ‘2회차’에서 오는 관록 덕분일 것이다.

청와대 원형 보존해 복합문화공간 추진

기대만큼 우려도 있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이 대표적이다.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듯, 유 장관은 취임 직후 말 많고 탈 많은 예술인 지원사업에 대대적인 혁신을 예고했다. 외부 전문가가 아니라 지원사업 기관 직원이 심의에 책임을 지게 하고, 사업 공모를 분할 진행해 연중 신청기회를 확대하는 것이 골자다.

글로벌 OTT에 위축된 영상산업에 향후 5년간 1조원 규모 펀드를 조성하는 도약 전략도 전격 발표했다. 살림밑천인 예산확보를 위한 현장 파악도 한창이다. 13일에도 하루종일 각분야 현장 관계자 간담회를 3개나 소화하고 오후 늦게 기자를 만났지만 지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무대에서보다 더 에너지가 넘쳤다. “자유롭게 살다 새벽부터 밤까지 매여있으니 그새 3㎏가 빠질 정도로 힘들어요. 기왕 맡게 됐으니 좋은 결과물 내고 싶은 욕심에 최선을 다하고 있죠. 아무 것도 못 남기고 고생만 하다 끝나면 안되니까요.”

유인촌 장관은 K컬처의 시대에 순수예술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전략적인 문화정책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유인촌 장관은 K컬처의 시대에 순수예술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전략적인 문화정책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예술인 지원사업 혁신을 예고했는데, 블랙리스트 파문 이후의 정책을 어떻게 보나요.
“그간 블랙리스트를 방지한다며 외부 전문가 천여 명 중 무작위로 뽑아 심의를 맡겨 왔어요. 문제가 생기면 기관은 전문가 탓으로 돌리고, 전문가들은 결과에 책임을 안 지니 발전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가 없죠. 직원이 책임을 지게 하면 아무리 ‘빽’을 써도 소용없고, 결과도 끝까지 챙기게 될 거예요. 직원들은 부담스럽겠지만, 지금 바꿔줘야 자리를 잡을 겁니다.”
책임심의관이 편향될 수 있고, 경쟁도 심해지지 않을까요.
“권한만큼 책임이 따르니 절대 함부로 못하죠. 실력이 있는데 지원을 못 받는다면 분명 문제제기가 될 것이고. 직원들이 끊임없이 현장과 만나면서 스스로 전문가가 되어 선택과 집중이 가능한 심사기준을 만들어야 할 겁니다. 결국 잘하는 사람을 도우려는 거예요. 지금의 지원은 100에게 조금씩 주는 생계보조형이니, 작품을 하면 모두 적자를 보는 구조거든요. 50을 뽑아 확실하게 지원해 주고, 나머지 50은 그 결과물에 자극받아 더 노력해서 도전하게 하자는 거죠. 내가 다 옳다는 건 아니에요. 어떤 지원 정책이든 풍선효과가 있으니, 보완재를 계속 만들어야겠죠.”
K컬처의 시대에 문화정책 총책임자로서 화두는 뭘까요.
“세계무대에 훨씬 더 진출시켜야겠다는 거죠. 이제는 대중문화뿐 아니라 순수예술도 끌어올려서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춰야 할 때입니다. 문화는 파급효과가 넓잖아요. 관광 전략 간담회에 뷰티업계에서 왔는데, 이런 자리에 처음 와 봤다더군요. 댄스팀 원밀리언은 수강생 70%가 외국인이라니 주변 숙소와 식당만 해도 영향력이 상당합니다. 문화를 팔아 경제를 일으킨 셈인데, 문화정책도 거기 발맞춰야죠. 그럼으로써 저작권 수입도 인정받아야겠고.”
MB 시절 K컬처와 무관하게 저작권법을 정비하셨죠.
“‘역사스페셜’ 방송을 진행할 때 조선왕조실록 CD-ROM 개발자가 찾아왔길래 600만원짜리를 좀 깎아서 샀어요. 한 달만에 해적판이 돌고 그 회사는 망하더군요. 그 기억 때문에 문체부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저작권인데, 직원들이 고생 많았죠. 사법경찰권을 갖고 리어카 해적판을 수거하러 다니고 별짓 다했더니, 딱 1년 만에 미국에서 우선감시대상국 딱지를 떼 줘서 결과가 빨리 나왔어요. 덕을 많이 본 게 음악업계죠. 영상은 아직도 불법유통이 있지만요.”
영상산업은 글로벌 OTT에 종속 위기인데요.
“제작사가 IP를 확보하게 하고 토종 OTT도 키워야죠. 당장 내년 6000억 규모 펀드를 조성할 거예요. 콘텐트 제작비가 너무 커져서 공적 자금만으론 어려우니 펀드를 조성해 시장이 돌게 해야 세계시장을 공략할 작품이 많이 나오겠죠. 콘텐트를 완성도 있게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많지 않잖아요. 우리가 콘텐트에 확실히 강하니 토종 OTT에 잘 태울 수 있는 방안을 만들면, 최소한 중앙아시아, 동남아까지는 우리 OTT가 커버할 수 있지 않을까요.”
15일 국립부산국악원을 찾은 유 장관. [연합뉴스]

15일 국립부산국악원을 찾은 유 장관. [연합뉴스]

2004년 서울문화재단을 설립하며 행정가로 변신한 그는 MB 정권에서 3년간 장관으로 재임하며 저작권법 정비 외에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대한민국역사박물관·한글박물관 건립, 국립현대무용단 창설 등 굵직한 일을 많이 했다. 그런데 퇴임 후 정치를 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무대로 돌아갔다. 당시 그는 “장관도 내게는 연극에서 맡았던 배역으로 생각된다. 이제 작은 무대에서 연극의 본질을 찾겠다”고 했다. 그랬던 만큼  ‘2회차’ 장관을 쉽게 맡은 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인연이 있었나요.
“전혀 없었는데, 대통령이 문화에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엊그제도 전통국악 살려보자고 일부러 전화를 하실 정도로. 김건희 여사도 전통 살릴 방법 찾자는 얘기를 많이 하시고요.”
그간 정치를 안한 이유는요.
“차라리 계속 할걸 그랬나요.(웃음) 그때는 이런 자리가 한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죽기 전까지 작품을 몇 개나 만들 수 있으려나 조바심도 났죠. 난 원래 로버트 드니로 같은 배우를 꿈꿨거든요. 스튜디오 차려서 구상하고 연습하다 보니 이쪽으로는 진도가 안 나갔어요. 이번에 마치면 결국 또 무대로 돌아갈거에요. 그땐 ‘리어왕’을 하고 싶고, 80살쯤 ‘홀스또메르’도 해야죠. 정말 딱 좋은 나이거든요.”

최근 대학로 소극장 문화의 상징인 학전이 폐관한다고 알려져 문화계에 충격을 던졌다. 자신도 소극장을 오래 운영했던 유 장관은 “학전의 이름과 정신을 망가뜨리지 않게 노력하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끌고 온 것도 대단해요. 김민기씨가 직접 제작하던 때와는 다르겠지만, 문체부가 임대해서 순수연극 단체들이 저렴하게 대관하는 식으로 방법을 찾을 겁니다.”

배우와 행정가 두 얼굴이 공존하기 힘든데, 국내 유일한 성공 케이스인 것 같습니다.
“배우라서 오히려 잘할 수 있었어요. 대통령부터 안 해본 게 없잖아요. 파우스트 한 편에 세상이 다 있는데, 그런 경험이 다 재산이 됐죠. 현장의 아쉬움을 아니까 막 덤빌 수 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그때 불도저처럼 일했어요. 게임 산업이 성장해야 되는데 문체부가 진흥과 규제를 같이 하고 있길래 우린 진흥만 할테니 규제는 떼어가라고 했더니, 국회에서 이상한 사람 다 봤다더군요. 옳다고 생각하면 겁 없이 밀어부친건데, 그때처럼은 못하겠죠.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윤 대통령, 직접 전화 할 정도로 문화 관심

‘그때’와 ‘지금’ 사이 12년이 흘렀다. 그의 정책이 복고풍 아닐까 걱정들 하지만, 오히려 “하던 일만 하지 말고 선제적으로 트렌드를 끌고가야 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예술은 아날로그라며 틀을 잘 벗어나려 하지 않지만,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지원하려 해요. 융복합이나 AI와의 만남도 적극 확장해야죠. 젊은 세대는 재밌는 작업을 많이 하더군요. 곧 AI 관련 활용지침도 발표할텐데, 대비를 잘 하면 기술과 예술이 공존할 수 있을 거예요. 할리우드에서도 뒤늦게 파업하며 해결했지만, 우리는 그러기 전에 상당히 선제적으로 가고 있다고 봅니다.”

지금 유 장관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내년도 예산확보다. 인사청문회에서 1.1%대인 문화예산을 향후 2%로 확대하고 싶다고 했던 그다. 취임 전 이미 결정된 예산안에서는 올해보다 2388억원 증액(3.5%)된 6조 9796억원이 문체부에 편성됐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영화제·지역문화진흥 등 비효율이 지적된 분야는 대폭 삭감돼 불만의 목소리도 있는 상황이다.

“예산소위에서 쟁점되는 사안들이 좀 있는데, 대체 프로그램으로 운영의 묘를 살려야죠. 예술강사 보조금 50% 삭감이 문제가 됐지만, 내년부터 방과후 늘봄학교와 사회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소화할 예정이에요. 국고지원 영화제를 줄이는 대신 영화 펀드에 엄청 넣어놨으니 투자 개념이고요. 만화영상진흥원 문제는 애초에 기초자치단체가 정부 보조금으로 광역에 지원금을 나눠주는 기형적인 형태더군요. 앞으로 콘텐츠진흥원이 정비해서 더 키울테니 업계 입장에선 훨씬 낫겠죠. 그밖에 삭감된 예산들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기조 안에서 최대한 증액에 노력할 겁니다. 이번에 7조는 넘겼으면 해요.”

향후 문화예술 예산 2%대로 가려면 어떤 분야가 절실한가요.
“기초예술이죠. 순수예술은 산업이 아니라며 지원금도 콘텐트 쪽과 비교가 안될 정도니 예술가들이 자기 인건비는 거의 못받고 있어요. 콘텐트도 원천 소재는 순수예술에 있으니, 콘텐트의 50%만이라도 순수예술에 할애해야 한다고 봐요. 지금 콘텐트 예산이 1조원인데, 순수예술 지원은 1000억 정도거든요. 5000억 확보를 목표로 뛸 겁니다. 내가 올해 농사가 끝난 뒤 왔지만, 내년에는 확실한 내 구상으로 예산을 넣어야죠. 어려운 일이지만, 이 나이에 불철주야 뛰어다니면서 그것 하나 개선을 못하고 나가면 바보짓 하는 거라 생각해요. 이 이야기는 꼭 써주세요. 어떻게든 개선해야 하니까.(웃음)”
청와대 재단을 설립해 복합문화공간을 짓는다고 해서 우려도 있는데요.
“제대로 운영하려면 법인조직을 만들어야지 다른 방법이 있나요. 그렇다고 청와대를 대단히 바꾸겠다는 건 아니고, 그 자체가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이니 원형 보존이 제일이라고 봐요. 옛날 비서동에서 근무하던 책상과 비품도 보존했으면 하고, 춘추관에서 역대 대통령들이 브리핑하던 영상을 틀어주고, 일반인들도 브리핑 체험도 하면서 옛날 청와대에 대한 추억을 그대로 재현해 놓고 싶어요.”
이번 재임 중에 꼭 해결하고픈 과제라면.
“젊은 사람들 만나보니 문화예술도 창업지원 프로그램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요. 요즘 스타트업 창업지원이 많은 반면, 예술한다고 하면 대출도 못받는다는 거죠.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일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순수예술도 산업과 연계될 수 있도록 좀더 확실한 뒷받침을 할거예요.  그게 내 소명 중 하나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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