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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수정 구슬의 눈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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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5호 31면

라종일 전 주일대사·동국대 석좌교수

라종일 전 주일대사·동국대 석좌교수

“북한이 언제쯤 붕괴하겠습니까?” “예?” 당혹스러운 질문에 한동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세기말 90년대 주로 미국 인사들의 물음이었다. 특히 공적인 지위나 교육 수준이 높은 분들이기에 더욱 황당한 느낌이 특별했다. 미국인들뿐만이 아니었다. 영국의 저명한 학자 한 분은 북한 정권이 5년 안에 붕괴하리라는 논문을 학술회의에 제출하기도 했다. 하버마스의 자본주의의 위기 분석 틀을 북한 체제에 적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북한 정권의 조기 붕괴 전망 없어
실제 붕괴 위기 처하면 더 큰 문제
돌발상황에 대한 협의조차 없어
통일 도와주리란 기대도 어려워

선데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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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 국내에도 북한의 조기 붕괴와 그에 따른 통일의 전망을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다. 상대해야 하는 분들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은 한에는 진지하게 응답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예측(prediction)과 예상(forecasting)을 구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했다. “전자는 신비한 초능력자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앞날을 예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물론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후자는 가능한 한 합리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분석하면서 미래를 조망해 보는 것인데, 쉬운 예가 일기예보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일정한 틀을 상정하고 그 안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 항수 등의 상호작용을 분석해 보면 어느 정도 앞날을 전망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까지는 질문을 한 분들이 아직 그럴싸한 답변을 기대하는 것 같은 표정들이다. 이어서 실망이 뒤따른다.

“우선은 북한의 장래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 중에 중요한 것이 우리 측, 특히 미국의 대북정책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흔히 기상과 정치가 유사하다는 말들을 합니다. 둘 다 변수가 많고 유동적이어서 예측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에는 일기예보에는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일정한 변수들이 나름의 의지가 있고 때로는 예측의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이디푸스 효과(Oedipus Effect)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언이 현실에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붕괴한다고 미리 떠들면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드문 경우이지만 흥미 있게 듣는 분도 있다. 대개는 기대했던 쉬운 답변을 듣지 못한 것에 실망과 짜증까지도 나는 표정이다. 북한의 조기 붕괴를 생각하는 분들은 그것이 통일과 같은 좋은 결말로 이어지거나 아니면 붕괴가 임박한 정도의 위기가 비핵화 같은 난제 해결의 기회가 되리라는 예상인 것 같았다. 두 가지 모두에 긍정적인 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 이후 이런 식의 쉽고 간단한 해결의 희망은 계속 살아남아 있는 것 같다.

현실은 미래학자들의 무덤이라는 말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가능한 대로 앞날을 가늠해 보고 그것에 대처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옳은 일이다. 단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상식으로 우리와는 매우 다른 현실을 우리들의 잣대로 우리들의 희망에 따라 전망하는 것이다. 지나친 비관이나 지나친 낙관은 모두 엉뚱한 결론으로 치닫는다. 좋은 예가 바로 북한 정권의 조기 붕괴 예상이다. 예상이 가능한 미래에 북한 정권이 붕괴하리라는 전망은 없다. 더 중요한 문제는 북한 정권이 붕괴하거나, 붕괴에 직면하는 위기에 처하는 경우 그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주변 모두에게 좋은 소식이 될 가능성은 작다는 점이다.

얼핏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나 우리 이웃이 적어도 세 가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인도주의적인 위기이다. 북한 정권이 위기에 처하는 경우 혼란의 와중에 주민들이 직면해야 하는 매일 매일의 생계나 안전을 누가 책임지고 관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더욱 중대한 건 군사적인 위기다. 엄청난 규모의 상비군 외에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북한 예비군의 규모도 수백만에 이른다. 그 외에 위험한 대량 살상 무기들도 잔뜩 비축하고 있다. 정권이 위기에 처하는 경우 누가 이런 문제들을 관리할 것인가?

구동독의 경우 국가인민군(Nationale Volksarmee)이 십수만 정도에 불과해 서독 주도 통일에 큰 장애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필자가 통일 이후에 구동독 군인들을 만나 보면서 알게 된 것은 조금 달랐다. 특히 동원 해제가 된 장교들의 불만이 많았고 그중 몇몇은 마지막까지 군사 행동으로 서베를린을 점령해 통일을 막으려는 계획을 추진했다고 털어놓았다. 이 경험을 신문에 기고한 일도 있었다.

또 다른 어려움은 국제관계의 위기다.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 간에는 북한 내부의 어떤 돌발 상황에 관해 어떠한 합의는커녕 협의를 한 일도 없다. 돌발 상황에서 각기 어떤 행동으로 나설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지만 이들이 우리의 희망대로 순조로운 통일을 도와주리라는 기대를 하기 어렵다.

역사상 강대국들의 개입과 분쟁의 현장이 된 불행한 경험이 되풀이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앞설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근래에 더욱 나쁜 방향으로 진전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다른 접근들이 초기의 낙관적인 성과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핵무기 개발을 막지도 못했다. 한반도의 문제에 쉽고 단순한 해결은 없기에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면 아마도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라종일 전 주일대사·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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