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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의 시선

장제원, 억울한 사정 모르지 않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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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국민의힘에서 “영남권 중진은 험지 출마하라”는 인요한 혁신위원장의 권고가 나오기 앞서 유일하게 험지 출마를 선언한 이는 비윤, 하태경 의원 단 한명이다. 3선인 그는 해운대 지역구를 포기하고 서울 출마를 선언했다. 게다가 웰빙정당 정치인 답지 않게 찰진 전투력을 발휘한 이력도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여성가족부가 민주당의 대선 공약을 개발한 사실을 폭로한 게 대표적이다. 2021년 가을. 하 의원은 전주혜 의원 명의로 배달온 우편물에 눈길이 갔다. 같은 당 의원이라면 직접 전달하면 되는데 굳이 우편으로 보낸 걸 이상히 여긴 하 의원이 봉투를 뜯자 여가부 이메일을 캡처한 문서가 튀어나왔다. ‘중장기 정책 과제’란 제목 아래 과장급 간부들에게 민주당 대선 공약 개발을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험지출마 선언 의원, 하태경 한 명
총선 앞서 여당 인적 쇄신은 필수
친윤 핵심일수록 헌신 나설 시점

놀란 하 의원이 봉투 겉면을 보자 ‘광화문 우체국’ 소인이 선명했다. 여가부가 있는 정부종합청사 인근 우체국이었다. 여가부 내부 고발자가 ‘전주혜’란 가명으로 보낸 자료임을 직감한 하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여가부 차관이 과장급 간부들에게 민주당 공약 자료 제출을 지시했다”고 폭로했다. 여가부는 이를 시인하면서도 디테일은 함구했다. 하 의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가부에 진상 공개 요구서를 매일 4~5번씩 한 달 넘게 보냈다. ‘요구서 폭탄’이 여가부 내에서 소문이 나면 제보자가 움직여줄지 모른다는 계산이었다. 작전은 적중했다. ‘전주혜 의원’이 보낸 두 번째 광화문발 봉투가 의원실에 배달됐다. “부처 명칭에 ‘청소년’을 포함한다” 등 여가부발 민주당 대선 공약 19개가 담겨있었다. ‘광화문 전주혜’를 통해 스모킹건을 얻은 하 의원은 2차 폭로에 나섰다. 파장은 엄청났다. 김경선 차관 등 여가부 간부들이 줄줄이 고발당했다. 하태경 의원은 “민주당은 공무원이 자료 안 주면 30분마다 ‘전화 폭탄’을 때려 항복을 받아낸다. 우리 당에 없는 게 그런 전투력이라 험지 출마에 도전한 것”이라고 했다.

비주류 의원도 이럴진대 친윤들은 험지 출마 요구에 마이동풍이다. 특히 친윤 핵심인 장제원 의원은 지난주말 4200명 지지자가 운집한 대규모 외곽 조직 행사를 했다. “알량한 정치 인생 연장하면서 서울 가지 않겠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고 한다.

그로선 억울한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2012년 총선에서 그는 ‘박근혜 키드’ 손수조에 밀려 불출마해야 했다. 4년 뒤 총선에서도 당이 손수조를 밀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어렵사리 재선 고지에 올랐다. 또 그의 지역구인 사상은 ‘찐 텃밭’이 못된다. 민주당세가 제법 되는 ‘낙동강 벨트’에 속해 19대 총선에선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당선된 곳이다. 험지 출마 요구가 섭섭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장제원은 전투력도 상당하다. 중앙일보가 지난 5월 11일 선관위 사무총장·차장 딸 특혜채용 의혹을 폭로하자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이었던 그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닷새 만에 전체회의를 열고 선관위 사무총장·차장을 강도 높게 추궁했다. 선관위 간부들이 찾아와 “살살 해달라”고 애걸했지만 가차 없었다. 이 회의에서 선관위의 위선과 부패가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민심은 격노했다. 사무총장·차장은 옷을 벗었고 치외법권이던 선관위는 감사원·권익위의 칼날 아래 수술에 들어갔다.

선거운동 단속권을 가진 선관위는 국회의원들의 저승사자다. 선관위가 의원들의 비호 속에 수십 년 무풍지대로 군림한 이유다. 이런 선관위에 제대로 칼을 들이댄 의원이 장제원이란 점에서 그는 평가할 만하다. 친윤 핵심이란 위치와 자신감도 선관위에 칼을 대는 용기의 원천이 됐을 것이다. 바로 그 이유에서 이제 장제원의 용단에 관심이 모인다. 그는 지난 1년 반 윤석열 정부 국정의 핵심 추로 작동했다. ‘김장 연대’를 통해 국민의힘 당권이 김기현 대표에게 가는 데 큰 역할을 한 이도 장제원 아닌가.

그런데 그 김기현 체제로 치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은 참패했다. 이에 따라 총선을 앞두고 당의 혁신이 절체절명의 과제로 대두했다. 혁신 의지를 국민에 입증하는 요체는 뭐니뭐니해도 물갈이다. 내년 총선의 성패에 남은 3년 임기의 운명이 달린 현 정권으로선 승리를 위해서라면 ‘피바다’를 넘어 신당 창당 수준의 물갈이도 불사한다는 의지가 충만하다.

정권이 물갈이 의지를 보이려면 그동안 국정을 주도해온 친윤 핵심들의 희생과 헌신은 불가피하다. 장제원 의원은 자의든 타의든 친윤 핵심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총선의 향배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그의 거취에 여의도는 물론 온 국민의 눈길이 쏠려있다. 용단이 주목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