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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나라’ 한대수가 필름으로 본 세상..."삶은 고통이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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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이자 포크록 음악의 대부로 불리는 한대수가 지난달 20일 필름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북하우스)을 발간했다. 사진 제이슨 서, 북하우스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이자 포크록 음악의 대부로 불리는 한대수가 지난달 20일 필름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북하우스)을 발간했다. 사진 제이슨 서, 북하우스

장발에 하모니카를 목에 걸고 걸걸한 목소리로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노래하던 20대 청년.
1968년 TBC(동양방송)의 쇼 프로그램 ‘명랑백화점’에 등장한 가수 한대수(75)의 모습은 대한민국에 충격을 안겼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이자 포크록 음악의 대부로 불리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늘 외로웠다. 1집 ‘멀고 먼 길’(1974)의 앨범 커버는 지금 봐도 파격적이었고, 그 안에 수록된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 등 대중에게 사랑받던 명곡은 정권에 의해 금지곡이란 딱지가 붙었다. '체제 전복적인 음악'이란 이유였다.

폭압적인 분위기 속에 음악 만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던 시절, 그를 버티게 한 건 사진이었다. 사진은 그에게 경제적인 여유를 줬고, 생각과 감정을 담아낼 또 다른 창구가 됐다. 지난달 20일 발간된 한대수의 필름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북하우스)은 그가 1960년대부터 2007년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집대성한 책이다. 지금껏 공개한 적 없는 미공개 희귀 흑백·컬러 사진 100여 점을 실었다. 14일 저녁, 미국 뉴욕에서 딸 양호(16)의 뒷바라지에 여념 없는 한대수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늦둥이 딸의 교육을 위해 2016년부터 뉴욕살이를 하고 있는 그다.

“2023년에 봐도 기괴하고 이상하죠? 바로 제 자화상이에요. 하하”

화제의 1집 앨범 커버 사진에 대해 그는 카메라 삼각대를 세워두고 손수 찍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뉴욕 인스티튜트 오브 포토그래피 사진학교에 들어가 사진학을 전공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음악은 클래식만 인정받던 시대였다. 내가 하는 음악은 전부 ‘딴따라’ 광대 짓이라 엄마는 늘 나를 못마땅해 했고, 주변에서도 장발이다, 옷을 이상하게 입는다 등의 이유로 나쁜 말을 엄청 해댔다”고 떠올렸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회 관념들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현상 과정에서 온도를 높여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 뿐 아니라 사진으로도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그때부터 생겨났던 게 아닐까.

1974년에 발매된 한대수의 1집 '멀고 먼 길'의 앨범 커버.

1974년에 발매된 한대수의 1집 '멀고 먼 길'의 앨범 커버.

한국에서 자신의 모든 노래가 금지곡으로 지정된 뒤 뉴욕으로 건너간 한대수는 오랫동안 상업 사진가로 활동했다. 그는 “1960년부터 1990년대까진 미국 광고업의 최전성기였고, 나 역시 상업 사진을 찍으며 힘들었지만 밥벌이를 할 수 있었다”면서 “다만, 속옷, 넥타이, 귀걸이부터 건물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걸 100장, 1000장씩 찍어내다 보니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고 돌이켰다.
그러다 종군 사진작가 데이비드 덩컨 더글러스와 유진 스미스의 작품을 접하며 “사진도 음악처럼 인간의 심리를 자극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 반성까지 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가 '거리의 사진작가'를 자처하게 된 계기다.

“제가 사는 뉴욕만 해도 체감상 50%가 홈리스예요. 밖에 나갈 때마다 홈리스가 눈에 띄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가로등 쳐다보듯 지나치죠.”

한대수 사진집 속 피사체는 모두 그가 관심과 연민을 가진 대상이다. 주로 나이 든 노인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다. 그의 카메라 렌즈는 도시 빈민을 향하기도 한다. 뉴욕은 물론 파리, 모스크바, 마드리드 등 주요 도시에서 공허한 눈빛의 노숙자들이 한대수의 필름 카메라에 담겼다.
“나의 일부를 보는 것 같다”는 거리의 악사들도 찍었다. 그는 쫓기듯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을 보며 “똑같은 한 인생, 똑같은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태어났을 텐데 쓰레기 취급을 받는 인생이 되어버렸다니... 이 현상이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달한 사회의 결과물이라면 정말 슬픈 일”이라며 개탄했다.

한대수 필름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에 실린 1969년 뉴욕의 모습. 사진 한대수

한대수 필름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에 실린 1969년 뉴욕의 모습. 사진 한대수

1960년대 말 뉴욕과 서울 풍경을 담은 흑백 사진도 인상적이다. 동시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조적이다. 자본주의의 화려함과 빈민의 절망이 뒤섞인 뉴욕의 모습, 개발도상국이 되기 전 가난한 나라의 수도 서울의 모습은 기록 사진으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한대수는 “무엇보다 우리 문화와 역사의 일부를 볼 수 있다. 어떤 사진들은 외롭고 괴롭게 살아왔던 나의 인생을 거울처럼 보여준다”고 했다.

한대수 필름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에 실린 1967년 뉴욕의 거리. 사진 한대수, 북하우스

한대수 필름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에 실린 1967년 뉴욕의 거리. 사진 한대수, 북하우스

한대수 필름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에 실린 1969년 서울의 모습. 사진 한대수, 북하우스

한대수 필름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에 실린 1969년 서울의 모습. 사진 한대수, 북하우스

“산다는 것은 문제가 참 많아요. 살아 있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고민도 하죠.”

평생을 보헤미안처럼 살아온 한대수가 정의한 삶은 '고통'이다. 부정적인 뜻 만은 아니다. 그의 인생관은 사진집의 원제 ‘I suffer therefore I am’에 녹아있다. 그는 "늘 고통을 받지만, 그것이 곧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의미"라고 했다.
“삶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면, 아침에 일어나 몸을 씻고 학교·직장에 가고 맛있는 것을 먹는 이런 별일 없는 보통의 일상에 감사할 수 있죠. 기왕에 태어났으니 범사(모든 일)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내 삶의 구절입니다.”
'고통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한대수의 방식이다.

한대수 필름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 사진 북하우스

한대수 필름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 사진 북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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