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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김정은과 리커창

중앙일보

입력

2018년 3월 북?미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만난 리커창 전 총리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로 손잡고 파안대소 하는 장면.

2018년 3월 북?미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만난 리커창 전 총리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로 손잡고 파안대소 하는 장면.

리커창 중국 전 총리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지난 2일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 열사묘역에서 조용히 치러졌다. 북한은 조전을 보내는 등 리커창을 애도하는 어떤 메시지도 내지 않고 있다. 북한의 태도를 두고 시진핑의 ‘눈치’를 본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과거 사례를 보면 저우언라이 사망 이후 북한은 화궈펑-자오쯔양-리펑 전 총리의 사망에 어떤 메시지도 내지 않았다. 반면 마오쩌둥-덩샤오핑-장쩌민 등 최고지도자의 사망에는 조전과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다.

리커창은 북한과 인연이 깊은 편이 아니다. 

부총리 시절(2008~2012)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3차례 만난 정도다. 총리 시절(2013~2022)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베이징에서 1차례 만났다.

리커창은 김정일이 2010년 5월 3~7일 베이징을 방문할 때 랴오닝 성 다롄에서 영접했다. 그것이 김정일과의 첫 인연이다. 당시 김정일의 방중은 천안함 폭침 사건 직후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리커창이 부총리를 하기 이전에 북한과 맞닿은 랴오닝 성 당서기(2004~2007)를 한 것이 김정일을 영접하는 계기가 됐다.

두 번째 인연은 김정일이 2011년 5월 20~26일 다시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다. 리커창은 김정일이 관심을 두고 있던 정보기술(IT) 관련 회사를 방문할 때 동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인연은 리커창이 2011년 10월 23~25일 평양을 방문하면서다. 부총리 시절로 김정일이 사망하기 2달 전이다. 리커창은 그때 김정은을 처음 만났다. 김정은은 후계자로 선정된 이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김정일은 리커창에게 김정은에 대한 지원을 부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경쟁자였던 시진핑은 리커창에 앞서 2008년 6월 17~19일 평양을 방문했다. 리커창보다 3년 정도 먼저 간 셈이다. 2007년 중국공산당 제17차 당 대회에서 후계자가 된 이후다. 후계자가 되면 의례적으로 외국 가운데 평양을 제일 먼저 방문하는 관례에 따른 것이다. 그것은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도 마찬가지였다. 후진타오도 1992년 후계자로 내정되고 1993년 7월 26~29일 외국 가운데 평양을 제일 먼저 찾았다.

시진핑이 2008년 6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을 만났지만, 김정은을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김정은은 김정일이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2009년 1월 8일 후계자로 정해졌다. 이를 고려하면 시진핑이 방북했을 때 김정은은 대외활동을 하지 않던 시기로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리커창이 김정은을 다시 만난 것은 2018년 3월이다. 김정은이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하자 시진핑이 그를 베이징으로 초청하면서다. 리커창과 김정은은 모두 신분이 과거와 달라졌다. 리커창은 총리, 김정은은 국무위원장으로 만났다. 두 사람은 2번째 만남으로 반가웠는지 서로 손잡고 파안대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리커창이 ‘식물 총리’라는 소문이 떠돌던 때라 관심을 더 끌었다.

우연인지 몰라도 김정은이 2018년 6월 싱가포르로 제1차 북‧미 정상회담을 하러 갈 때 공교롭게도 리커창이 타던 전용기를 이용했다. 당시 시진핑이 타던 전용기는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 참석에 사용되고 있었다. 북한이 먼저 중국에 전용기를 요청하고 중국이 이를 받아들여 김정은이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김정은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시진핑을 2019년 6월 20~21일 평양에 초청했다. 북‧미 정상회담 결렬로 외교적으로 어려움에 부닥치자 기댈 곳은 중국밖에 없었다. 시진핑이 돌아간 뒤 김정은은 북‧중 수교 70주년이 되는 2019년 10월 6일 즈음에 리커창을 평양에 초청하려고 했다. 10년 전 북‧중 수교 60주년을 맞아 원자바오 총리의 방북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리커창은 평양에 가지 않았다.

중국 역대 총리 자격으로 평양에 간 사람은 저우언라이(1958년 2월 14~21일, 1970년 4월 5~7일)-화궈펑(1978년 5월 5~10일)-자오쯔양(1981년 12월 20~24일)-리펑(1991년 5월 3~6일)-원자바오(2009년 10월 4~6일) 등이다. 주룽지와 리커창만 총리 자격으로 평양에 가지 않았다.

북한은 경제를 담당하는 중국 총리의 방북을 좋아했다. 

북한에 ‘산타클로스’인 저우언라이뿐 아니라 화궈펑도 1978년 5월 방북할 때 선물 보따리를 가져갔다. 화궈펑은 김일성에 선물 3가지를 풀었다. 첫째, 1억 달러 상당의 차관을 제공한다. 둘째, 북한의 제2차 7개년 계획(1978~1984) 동안 30개의 공장건설을 지원한다. 셋째, 대북한 원유공급에서 150만톤을 추가로 공급하고 원유가격도 소련이 1배럴에 11달러에 거래한 것에 비해 4.3달러에 제공한다 등이다. 화궈펑이 이렇게 선물 보따리를 푼 것은 중국의 미‧중 국교정상화 추진을 이해해 달라는 반대급부였다.

원자바오도 2009년 10월에 방북했을 때 선물 보따리를 가져갔다. 2,000만 달러 상당의 무상지원과 단둥~신의주 사이 신압록강대교 건설 등이다. 북한의 제2차 핵실험(2009년 5월 25일)과 김정일의 뇌졸중이 경제지원의 배경이다. 원자바오는 북한에 6자회담 참가를 요구했고, 북한은 조건만 맞으면 참가하겠다고 했다.

핵실험을 한 북한에 무슨 경제지원이냐고 할지 모른다. 북한은 중국에 전략적으로 필요한 존재다. 중국은 미국의 대중 포위전략에 우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북한이다. 경제지원을 하면서 국제사회와 대화를 통해 핵 문제를 풀어갈 수 있도록 설득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그런 노력이 무용지물로 돼 가는 것 같다. 북한은 핵 문제를 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리커창의 정치적 공간이 넓었다면 남-북-중 사이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 리커창은 한국을 4차례 방문할 정도로 인연이 깊다면 깊다. 그리고 김정일‧김정은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남북 관계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중국 지도부에는 그런 인물을 찾기 어렵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이 의미는 없지만, 리커창의 사망을 계기로 답답해진 남-북-중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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