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현대한국회화」전을 보고…이일(미술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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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오늘날 ,특히 80년대 들어서부터 현대미술의 추세는 종래의 개념으로는 묶을 수 없는 혼 성적인 양상을 띠고있다.
회화에 있어서도 이미 「구상」과 「추상」이라는 이분법은 그 시효를 잃은 지 이미 오래됐다.
이는 비단 표현양식상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회화·조각 할 것 없이 이 표현 영역의 확산은 필연적으로 재료·기법의 영역에로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말해 현대미술이 분야마다 스스로의 영역을 보다 넓은 지평에로 열어놓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확산적인 현대미술의 추세 속에서 유독 회화에 있어서의(왜냐하면 조각에 있어서는 동·서라는 구분이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다) 동·서양화라는 장르구분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만일 그 구분이 순전히 재료 또는 기법상의 문제에 기준을 둔 것이라면 이 역시 시대착오적 발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가까운 한 예로 현재 서울국제미술제에서 보듯 한지를 사용한 서양화가들의 작품을 동양화 또는 한국화라 부르겠는가. 또 이른바 「한지작업」에 열중하고있는 「서양화과」출신의 우리 나라 화가들을 뭉뚱그려 「한국화가」라 부르겠는가).
「1990 현대한국회화」전은 다시금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조명 내지 검증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래의 구분에 의한다면 50명의 출품작가중 한국화·서양화의 비율은 반반정도다. 그와 같은 분배의 의도는 어딘지 작위적이긴 하지만 회화에 있어서의 동·서라는 오랜 울타리를 허물어버린다는데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리고 실제로 적어도 재료·기법에 관한 한 서로간의 한계가 이미 사라지고 있음을 이 전람회는 실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 「한국회화」의 독자성, 그것은 결코 재료·기법상의 특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 전시회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교환 가능하고 동화가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회는 『독창성이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든 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신적 뿌리를 찾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다만 이 현대한국 회화전이 좀더 발전되기 위해선 몇 가지 개선할 점이 엿보인다.
첫째는 전시회의 명칭문제로, 지금의 명칭은 자칫 현대의 「한국화」전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이 혼동을 피하기 위해선 「한국 현대회화전」으로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둘째, 이 전시회는 매년 적지 않은 참신한 얼굴들을 등장시키고 있으나 아직 초대작가 선정이 「관례적」이라는 인상이 짙다. 이는 운영상의 맹점으로 평론가·작가로 구성된 운영위원 5명 전원이 작가 선정위원까지 겸하고 있는데, 작가가 작가를 선정한다는 것은 이 같은 초대전에는 맞지 않는다.
이 같은 맹점을 극복하기 위해 한사람이 대상작가를 선정하고 주제를 설정하는 총 커미셔너 제도의 도입이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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