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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고향은 있습니까? ‘허구’라도 좋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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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 시대의 허구를 찾아서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예술가 김범이 1998년 전시를 위해 출간한 『고향』이라는 책자는 “이 책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운계리라는 마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마을의 지명, 위치, 교통, 주변 환경, 구조, 경관, 생활, 산업, 풍물, 경제, 주민에 관한 정보를 고루 담고 있다.

“마을버스가 운계리의 학봉다방 앞에서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98년 현재 운계 주민의 자동차 보유 대수는 자가용이 30여 대, 트럭이 20여 대이다.” “근래의 무속신앙으로는 5·16 전후 한때 마을로 들어온 무당 원귀영이 각종 질병을 굿으로 고치는 등 신통하여 몇몇 주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김성준은 청운이발관의 이발사로서 대화중학교를 다닐 당시 미술부에 있었다. 군에서 이발병으로 복무하고 운계리에 돌아와 청운이발관에서 일하며 가끔 근처의 풍경을 수채화로 그린다.”

예술가 김범의 평창군 운계리
실제론 없지만 그리움의 대상

현대 한국인은 대부분 실향민
그럼에도 왜 고향을 얘기하나

허구의 아름다움 말하는 예술
우리는 사실 외에 농담도 필요

상상의 마을에 대한 보고서

생각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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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문장이 보여주듯이 『고향』의 내용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운계리에 대한 보고서라고 해도 될 만큼 사실 기술형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고향』의 핵심은 그 책의 두 번째 문장에 있다. “실제로는 진부면 내에 운계리라는 마을은 있지 않다.” 즉 김범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마을에 대해 보고한 것이다. 그는 사기를 치려고 든 것일까. 땅 투기에 혈안이 된 부동산업자에게 있지도 않은 땅을 팔아먹기 위해 문서를 위조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문서를 위조하고 싶었다면, 운계리라는 마을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짓을 한 것일까. “본래 이 책의 용도는 주로 자신의 고향을 모르거나, 고향을 알아도 감추고 싶어하는 분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분들은 지금까지, 이따금 누군가가 고향에 대해 물어보거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고향 자랑을 할 때 그다지 할 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때에 자신도 어딘가에 아름답고 정겨운 고향이 있다고 말하고 싶을 때엔 이 책에 쓰여 있는 마을에 대해 이야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즉 고향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려운데 그래도 이야기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쓴 것이다.

서울에서 났다고 서울이 고향인가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누가 이렇게 반문한다면, 요렇게 대꾸하고 싶다. 현대 한국인의 기본 조건은 실향민이라고. 다들 태어난 곳이 있는데, 왜 고향을 잃었다고 하느냐고? 혹은 고향이 없다고 하느냐고? 그곳은 당신의 출생지이지 고향은 아니다. 고향은 고향이되 진짜 고향은 아니다. 성장기 내내 긴밀한 상호작용을 한 끝에, 결국 자신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고장, 그래서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솟아오르는 곳, 그런 진짜 고향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런 의미의 고향이라면, 나도 없다.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랐건만, 서울은 그런 의미의 고향이 아니다.

자기 고향을 알아도 감추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렇다. 나고 자란 곳이 아름답기만 하겠는가? 고향이 아름답다는 통념을 버려라! 그렇게나 아름답다면 당장 가서 살든가! 나고 자란 곳이야말로 이제는 잊고 싶은 기억들이 생매장당한 곳인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누구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을 수도 있다, 혹은 누군가를 괴롭혔을 수도 있다, 이제는 지속하고 싶지 않은 인연들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남과 결혼해버린 첫사랑이 있을 수도 있다, 땅문서를 훔쳐 야반도주했을 수도 있다, 빚 갚기를 기다리고 있는 고리대금업자가 있을 수도 있다. 나고 자란 곳을 감추고 싶어할 이유는 많이 있다.

그러면 고향을 무시하면 되지 않냐고?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고향에 대해서 습관처럼 묻는다. 화제를 찾느라고 물을 수도 있고, 지연이나 학연으로 엮기 위해 물을 수도 있고, 정보를 캐내기 위해 물을 수도 있고, 달리 관심을 보이는 방법을 몰라서 물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우리는 고향 이야기로부터 헤어날 수 없다. 그래서 고향에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고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니 방문하기 좋은 곳이라기보다는 이야기하기 좋은 곳이 고향으로서는 최고다. 실로, 고향은 이야기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김범은 실향민들에게 고향 삼을 땅을 사주기보다는 (그럴 돈이 없을 것이다), 이야기할 수 있는 고향을 주기로 결심한다. “이 책에 서술된 운계리라는 마을은 우리가 고향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할 경우 우리의 고향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즉 이 고향은 발견해낸 대상이 아니라 만들어낸 대상이라는 점에서 ‘허구’다.

좋은 고향은 대체 어디에 있나

그러면 어떤 고장이 이야기하기 좋은 고향일까? 남들이 그 가치를 알기 어려운 희귀한 특징 같은 것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남들이 쉽게 동의해줄 만한 자랑거리가 있는 곳, 그곳이 좋은 고향이다. 어차피 고향은 가서 살 곳이 아니라 이야기할 곳이므로. 그래서 김범은 운계리에 대해 쓰면서 마을 인심이나 주변 산수처럼 소소한 이야깃거리를 덧붙인다. 한층 더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 지리상의 위치는 이 마을의 존재 여부가 확인될 위험성이 최소화될만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즉 남들이 함부로 가보려고 들거나, 남들이 알고 있을 만한 곳이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이 고향이 허구라는 사실을 들켜버릴 테니까.

이 허구의 고향에 대해서 맞장구를 치거나 반박을 할 사람은 거의 없다. 실재하는 곳이 아니므로 가본 사람도 없고, 가본 사람도 없으니 내 말이 틀렸다고 할 사람도 없다. 그래도 캐묻지 않겠느냐고? 그때는 “자연스럽게 얼버무리는 기교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맞장구칠 사람도 없지 않겠냐고? 그러면 외롭지 않겠냐고?

그렇지 않다. 이 『고향』이라는 책에 근거해서 저마다 운계리 출신이라고 주장해 온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은 같은 처지의 사람들. 즉 운계리 출신의 사람들이 우연히 서로가 동향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서로 반갑게 등을 두드리며 정겹게 고향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

21세기에 어울리는 향우회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걸맞은 향우회가 아닐까. 진정한 동지 의식은 같은 고향에서 자라났다는 데서가 아니라 같은 허구를 공유한다는 데서 온다. 왕국 신민(臣民)들이 왕권신수설이라는 허구를 공유하며 동지의식을 기르듯이. 민주국가 시민들이 인민주권 혹은 국민주권이라는 허구를 공유하며 동지의식을 기르듯이.

향우회가 가능하다고 해서 이 고향의 비밀이 널리 알려져서는 안 된다. “이 책이 꼭 필요할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읽혀야 할 것이며. 이 내용의 비밀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져서도 안 된다.” 즉 고향의 진실은 비의적(秘義的, esoteric)이다. 이 진실은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통되고 전승된다. “이 고향의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하여 우리의 고장을 수호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실로 고향뿐 아니라 많은 것들의 기원이 널리 알려지지 말아야 할 “고귀한 거짓말”(noble lie)인지도 모른다. 부모의 축재(월급이 아니라 혹시 고리대금업?) 자신이 태어난 원인(부모의 사랑이 아니라 혹시 못 참은 성욕?), 어떤 나라의 건국(사회계약이 계약이 아니라 혹시 폭력?), 어떤 헌법 제정 과정(토론보다는 혹시 협잡?) 등등.

물론 운계리의 모든 면이 다 비밀스러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고향』은 얼개만 제시할 뿐, 살은 각자 붙일 수 있다. 마치 헌법은 뼈대만 제공하고, 구체적인 법령은 나중에 추가되듯, “이 전반적인 자료를 토대로 하여 이곳에서 지내던 과거 자신만의 개인적 생활상을 구체화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신화·헌법·사랑, 그 공적인 허구

헌법도 수정헌법에 의해 변화되고 보완되듯이, 이 고향의 세부 사항도 바뀔 수 있다. “끝으로 덧붙여 두어야 할 것은 장래의 고향 방문 시한에 대한 것이다. 이 책에 서술된 운계리가 비록 변화가 적은 산촌 가운데 하나이지만. 우리가 속한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일이고 따라서 앞으로 다른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남의 의구심을 살만한 특수한 환경을 가지게 됨이 불가피할 것이다.”

자, 각자 살을 붙여도 된다니, 다들 자기 멋대로 거짓말을 지어내면 되지 않겠냐고? 그렇지 않다. 눈부신 허구는 아무나 지어낼 수 없다. 그것은 예술가의 몫이다. 뛰어난 예술은 사실이기에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아름답기에 사람들을 설득한다. 허구를 통해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이가 바로 예술가다.

누구나 살면서 고향을 이야기할 때가 있듯이, 인간은 살아내기 위해 공적(公的)인 허구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것을 우리가 거짓말이라고 부르건, 허구라고 부르건, 신화라고 부르건, 종교라고 부르건, 헌법이라고 부르건, 사랑이라고 부르건, 농담이라고 부르건, 예술이라고 부르건. 아니면 그저 삶이라고 부르건.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