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단체장 10여 명 주민소환 추진
지난해 6·1 지방선거 이후 전국 곳곳에서 일부 단체장 등을 상대로 주민소환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주민소환을 주도하는 쪽에선 "무능하고, 도덕성·자질이 부족하다"며 단체장 퇴출을 주장하는 반면 "'단체장 흔들기' 의도가 짙고 주민 간 갈등을 조장한다"며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4일 전국 각 자치단체 등에 따르면 현재 김영환 충북지사를 비롯해 경기 고양시장·성남시장·파주시장, 강원 태백시장·철원군수, 경북 상주시장, 경남 통영시장, 전북 남원시장, 서울 용산구청장 등에 대한 주민소환이 추진되고 있다.
충북지사 주민소환운동본부는 지난 8월 7일 "14명이 희생된 청주 '오송 지하차도 참사' 책임을 묻기 위해 주민소환 서명 운동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지난달까지 5만여 명이 서명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갈등·분열 조장" 반대 목소리도
김 지사는 참사 발생 당시 늑장 대응을 했다고 지적하자 "거기에 갔어도 달라진 게 없었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또 기록적인 폭우로 재난 대응 최고 단계(비상 3단계)였던 참사 전날 서울에서 7시간 머물렀던 사실도 드러났다. 논란이 일자 충북도 측은 "김 지사 서울행은 중요한 현안과 관련해 전문가 자문을 겸한 만찬 선약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소환 반대 여론도 만만찮다. 충북도기업인협회는 지난 8월 22일 기자회견을 열어 "주민소환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분열로 인해 지역 경제가 큰 위기에 빠질 것"이라며 소환 철회를 촉구했다. 같은 날 대한노인회 충북도연합회도 성명을 내고 "오송 지하차도 참사 원인과 책임 규명을 위한 전방위적 수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도지사 주민소환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했다. 이와 함께 충북도가 주민소환 서명 절차 감시 비용으로 26억원가량을 선거관리위원회에 보내야 하는 점을 들어 "예산 낭비"라고 주장했다.
"무능" "독단"…청구 이유 다양
최경식 남원시장도 주민소환 대상이 됐다. 남원시장 주민소환투표추진위원회는 지난달 11일 "최 시장이 무소불위 권한을 행사해 공직 사회 기강을 무너뜨렸다"며 남원시 선관위에 주민소환 투표를 청구했다. 이 단체는 최 시장 석사 논문 표절 의혹을 비롯해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입당 전력, 춘향 영정 논란 등을 청구 사유로 꼽았다. 최 시장은 취임 초 허위 학력 기재 의혹이 불거졌다. 인사 문제를 두고선 공무원 노조뿐 아니라 시의회와도 대립했다.
이에 대해 최 시장은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을 열어 "청구인이 제기한 문제들은 이미 사법기관에서 종결된 사안"이라고 반박했다. 소방학 박사만 취득했는데도 포털 사이트 프로필 등에 '소방행정학 박사'로 표기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기소된 최 시장은 1심에 이어 지난 5월 항소심에서도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았다. 검찰과 최 시장 모두 상고를 포기하면서 벌금형이 확정돼 시장직을 유지하게 됐다.
최 시장은 이날 "주민소환 대표자가 지난 선거에서 경쟁한 모 시장 후보 선거사무실 핵심 관계자"라며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시민을 분열시키는 투표에 막대한 세금(13억원 추정)이 들어간다"고 했다. 이 밖에 주민소환 청구 이유는 다양하다. "명분과 실효성 없는 시청 이전"(강영석 상주시장), "무능하고 독단적인 행정"(이현종 철원군수) 등이다.
2007년 주민소환제 도입…물러난 단체장은 0명
주민소환제는 주민 요구로 위법·부당한 선출직 공직자를 해직하는 제도다. 한국은 2007년 5월 지방행정 민주성과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했다.
그러나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까지 청구된 주민소환 125건 중 투표가 진행된 건 11건에 그쳤다. 이 중 유일한 주민소환 성공(해직) 사례는 2007년 화장장 건립 추진으로 갈등을 빚던 경기 하남시의원 2명(1.6%)이 전부다. 주민소환으로 물러난 단체장은 없다.
이 때문에 주민소환제 문턱을 낮춰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유권자 10~20%(시·도지사는 10%, 시·군·구청장은 15%, 지방의원은 20%) 서명을 받아야 주민소환 투표가 성사된다. 이후 유권자 3분의 1 이상이 투표에 참여해야 개표할 수 있다. 유효 투표 중 찬성이 과반수 나오면 직을 잃게 된다.
"양날의 칼…책임성 강화 순기능 크다"
반면 주민소환제에 대한 부정적 의견도 적지 않다. "법에 주민소환 청구 사유가 명시되지 않아 정치적 반대 세력에 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이유에서다. 일각에선 "소수 집단이 선출직 흠집 내기에 치중한다"는 시각도 있다.
정치학계에선 주민소환제를 '양날의 칼'에 비유한다. 잘 쓰면 '선출직 독단과 권한 남용을 막는 도구'지만 잘못 쓰면 '지역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흉기'가 된다는 논리다. 지병근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직접민주주의적 요소가 담긴 주민소환제는 대의제 한계를 보완하는 장치"라며 "당선 후 임기 4년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오만에 빠지기 쉬운 선출직 공직자에게 최소한 긴장감을 갖게 하고 책임성을 강화한다는 측면에서 순기능이 더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