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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4개 전쟁까지? '안보 외주화' 리스크 커진다…한국도 여파

중앙일보

입력

냉전 종식 30여년이 지난 2023년 유럽과 중동에서 동시에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을 예측한 나라는 지구 상에 거의 없을 것이다. 애초에 미국이 두 전장에서의 압도적 승리 전략을 사실상 폐기한 것도 이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만 및 필리핀에서의 중국발(發) 국지적 무력충돌 가능성까지 한꺼번에 다루게 됐다. 여기에 상시적으로 한·미를 향해 핵 사용을 위협하는 북한까지 '세 개의 전장+α(알파)' 시나리오에 직면했다. 미국의 확장 억제에 안보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한국은 미국의 부담 가중으로 한반도 안보에 빈틈이 생길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공습하는 모습. AFP. 연합뉴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공습하는 모습. AFP. 연합뉴스.

'두 개의 전쟁' 폐기했지만…

미국은 과거 두 곳에서 전면전이 벌어지더라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도록 억제력을 유지하는 '두 개의 전쟁' 전략을 채택했으나, 오바마 행정부 당시 방향을 수정했다. 중동 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고 국방 예산 감축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한 개의 주요 전쟁에 집중하고 이외 지역에선 소규모 작전으로 도발을 억제하는 이른바 '원 플러스' 전략으로 선회한 것이다.

다만 이처럼 두 개 이상의 전선을 감당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구상이 지난해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어그러지고 있다. 이와 함께 아시아에선 중국이 미국의 핵심 우방인 대만과 동맹인 필리핀을 대만해협과 남중국해에서 각각 위협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미국은 전쟁의 직접 당사국은 아니지만, 사실 그 이상으로 관여하고 있다. 외교 소식통은 "중동·아시아·유럽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건 미국과 소련의 체제 경쟁이 격화하고 베트남 전쟁이 터졌던 1960~70년대 이후 처음"이라고 지적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 백악관 회의에 참석한 모습. UPI.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 백악관 회의에 참석한 모습. UPI. 연합뉴스.

전면전 불씨 도사리는 중동

현재 국제사회의 이목이 가장 쏠린 지역은 중동이다. 이스라엘은 지난달 27일 지상전에 돌입했다. 3일 현재 가자지구 보건부 집계를 기준으로 팔레스타인인 누적 사상자 규모는 9000명을 넘어섰다.

예멘 반군 후티,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 등 이란의 지원을 받는 무장 세력이 전쟁에 개입하는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후티 반군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이스라엘의 도발이 멈출 때까지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배후에 선 이란 또한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직접 "시온주의 정권(이스라엘)의 범죄가 레드 라인(한계선)을 넘었고, 모두가 행동에 나설 수 있다"(지난달 29일)고 경고하며 참전 가능성을 시사했다. 확전 여부는 스스로를 '저항의 축'으로 칭하는 이런 반미 국가 및 세력들 얼마나 본격적으로 전쟁에 발을 담그느냐에 달렸다.

이스라엘군 장갑 불도저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가자지구에서 장갑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길을 닦는 모습. 로이터.

이스라엘군 장갑 불도저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가자지구에서 장갑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길을 닦는 모습. 로이터.

다만 2020년 이란 군부의 실세 거셈 솔레이마니가 암살됐을 때도 이란은 '피의 보복'을 공언했지만 결국 미국을 크게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대응 수위를 조절했다. 이처럼 이란 또한 미국과 정면으로 맞설 경우 후폭풍을 잘 아는 데다, 국제사회 제재와 코로나 19 여파가 겹친 경제 위기 속에서 전쟁에 얽힐 여력이 없다는 분석도 있다.

김강석 한국외대 아랍어과 교수는 "이스라엘의 행동을 억제하고자 하는 미국과 역내 국가들의 제어로 인해 확전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이라며 "다만 그 과정에서 인도주의적 위기는 계속될 수 있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는 이스라엘이 하마스 지휘부 제거에만 집중하고 있지만, 향후 무력 충돌이 잦아든 뒤에는 지역을 안정화하고 가자 지구의 새로운 거버넌스(지배 구조)를 수립하는 작업이 관건일 것"이라고 말했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지난달 18일(현지시간) 테헤란에서 열린 반(反)이스라엘 시위에 참석해 군중에 대한 존경을 표하며 양손을 가슴에 얹은 모습. 앞에는 이스라엘 공습으로 희생당한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상징하는 더미가 놓여있다. 연합뉴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지난달 18일(현지시간) 테헤란에서 열린 반(反)이스라엘 시위에 참석해 군중에 대한 존경을 표하며 양손을 가슴에 얹은 모습. 앞에는 이스라엘 공습으로 희생당한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상징하는 더미가 놓여있다. 연합뉴스.

어부지리 푸틴·시진핑, 곤경의 바이든

중동에서의 확전은 가까스로 막는다 해도 미국의 외교력이 이미 우크라이나, 대만, 남중국해 등지에서 상당 부분 소진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하마스의 최고지도자를 지낸 칼레드 마샬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의 관심을 우크라이나로부터 뺏어갔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하마스에게 고마워한다"며 "중국도 현 사태를 좋은 계기로 보고, 대만을 향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중국의 경기 침체로 시진핑(習近平) 리더십에 대한 회의론이 불거지면서 '대만 침공설'의 시기로 거론되는 2027년 이전에 중국이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가 짙어지고 있다.

이에 더해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과 필리핀 간 영유권 분쟁도 최근 격화하고 있다. 지난달 22일에는 남중국해에서 필리핀 보급선을 중국 해경이 저지하며 양국 선박이 충돌했다. 미국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 "필리핀 선박에 대한 어떤 공격도 미국과 필리핀의 상호방위조약 발동 사안"(지난달 25일 백악관 기자회견)이라며 경고에 나섰다.

하지만 남중국해를 관할하는 중국군 측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해·공군 병력을 조직해 필리핀 호위함에 대응했다"고 밝히는 등 긴장 수위를 높였다. 남중국해의 긴장이 해경 차원의 분쟁을 넘어서 '중국군 대 필리핀군'의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는 셈이다.

지난달 22일(현지시간) 남중국해에서 필리핀 보급선이 시에라 마드레 기지에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중구 해경선과 충돌해 정박한 모습. AFP. 뉴스1.

지난달 22일(현지시간) 남중국해에서 필리핀 보급선이 시에라 마드레 기지에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중구 해경선과 충돌해 정박한 모습. AFP. 뉴스1.

北 제어 역량 시급

이런 가운데 한국은 한반도가 새로운 분쟁의 도화선이 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과제에 맞닥뜨렸다. 미국의 방위 역량이 분산된 상황에서 북한이 한반도를 약한 고리로 판단하고 도발에 나설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듯 한국 또한 북핵 위협에 상시 노출돼 있다"며 "북한이 핵을 사용할 경우 직면할 결과에 대해 한ㆍ미가 '전략적 명확성'에 입각한 로드맵을 서둘러 만들고, 보다 구체적인 경고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미국 내부에선 공화당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를 제외하고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예산안만 별도로 처리하려는 분위기가 우세해지는 등 동맹·우방 지원에 대한 피로도가 쌓인 상황이다. 이에 더해 만약 내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바이든 행정부의 동맹 중심 기조를 폐기하고 자국 중심주의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안보를 미국에 '외주'하며 버티기엔 리스크가 크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워싱턴DC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한 뒤 인사하는 모습. 강정현 기자.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워싱턴DC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한 뒤 인사하는 모습. 강정현 기자.

韓도 국제적 역할 딜레마 

또 다른 과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진영이 뭉쳐 복수의 전장에 대응하는 가운데, 한국도 국제적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은 지난달 17일(현지시간) 최소 500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산되는 가자 지구의 알 아흘리 아랍병원 폭발에 대해 정부 차원의 별도 입장을 내지 않았고,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휴전을 촉구하는 유엔 총회 결의안 표결에도 기권했다.

이와 관련, 외교부 당국자는 지난달 31일 기자들과 만나 "하마스 테러를 규탄하고 인질 석방을 촉구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지 않아 기권했다"며 "정부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무력 충돌이 격화하고 사상자가 급증하는 걸 깊이 우려한다"고만 말했다.

한국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전 대규모 민간인 살상이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기계적인 중립만 지키고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한다면 가치나 원칙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국가처럼 비칠 우려가 있다. 자칫 서방에 끌려가듯 마지못해 목소리를 내게 될 수도 있다. 한국은 내년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앞둔 만큼 보다 주체적으로 대응방향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한국 정부 또한 중동 사태를 우리 안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준 위기 상황'으로 간주하고 국정에 임해야 한다"며 "대외적으로는 국제법과 유엔 헌장에 입각한 기본 입장을 정립해, 국가적 위상에 맞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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