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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의대 열풍을 의학 혁명의 동력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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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명자 KAIST 이사장·전 환경부장관

김명자 KAIST 이사장·전 환경부장관

‘혁신’은 21세기 유행어다. 혁신의 아이콘은 과학기술이다. 근대적 의미의 과학연구가 제도화한 것은 베를린 훔볼트대학(1810년 설립)에서였고, 이 모델이 미국 등으로 전파되며 연구중심대학을 낳았다. 그에 앞서 13세기 라틴 유럽에서의 ‘대학(universitas)’의 출현은 그 자체가 혁신이었다.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1088년 설립)이 최초로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황제의 공인(1158년)을 받은 이후 옥스퍼드 대학, 파리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등이 설립되면서 교과과정은 3학(trivium)과 4학(quadrivium)의 7학 교양학부와 3개 전공으로 짜여졌다. 3학은 문법·수사학·논리학, 4학은 산술·기하·음악·천문학, 3개 전공은 신학·법학·의학이었다. 이처럼 의학은 대학 설립 당시에도 신을 연구하는 학문과 맞먹는 지위였다.

지역의료와 필수의료 붕괴 위기
의대 증원만으로는 해결 역부족
바이오시장 바꿀 첨단기술 등장
융합혁신 인력·인프라 확보해야

그 의학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국내 사정은 지역의료 붕괴와 필수의료 불균형이 리스크를 넘어 위기국면이다. 정부가 의대 증원계획을 발표하자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2000년 의약분업으로 감축된 이후, 의대 입학정원은 2006년부터 전국 40개 의대 3058명으로 동결상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의 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3.7명이고 한국은 2.2명이다. 그러나 서울은 3.47명이고, 전국 4만1192개 병원과 의원 중 2만2545개가 수도권에 몰려있다.

2035년경에는 의사가 1만 명 정도 부족하리라 한다. 변수가 많아 얼마나 맞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이대로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의대 증원만으로 고질적 불균형이 해소되기에는 상황이 너무 복잡하다. 그렇다면 현장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의료계를 비롯한 이해관계자들과의 소통과 공감으로 실효적 방안을 도출하는 일이 남아있다. 높은 의료 역량에 걸맞은 사회적 협상 능력이 열쇠다.

그보다 본질적으로 연구개발의 최전선에서는 의학혁명에 버금가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기존 의학과 4차 산업혁명 핵심기술 간의 융합 혁신이 그것이다. 선진국은 이미 AI·빅데이터·딥러닝 기술과의 융합으로 방대한 데이터를 신속 처리해 성공확률이 높은 신약 후보물질을 골라내고 원격의료 서비스도 상용화했다. 디지털 기술과의 융합으로 암·치매·노화 극복을 위한 맞춤형 유전자, 세포치료, 뇌과학, 재생의료, 첨단의료기기, 디지털치료제, 원격의료 등에서 신천지를 열고 있다. 융합 혁신은 가장 비용 효과적인 혁신이다.

미국 칼 일리노이대학교 의대(CICM)는 2018년 공학 기반 의대를 설립했다. 학생들의 디지털 리터러시를 높여서 해결되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표는 AI와 머신러닝 등 공학과의 융합, 대학-기업 협업에 의한 임상의료 혁신이다. 그보다 먼저 이스라엘 테크니온 공대는 1969년 공대 내에 의대를 만들어 의료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모바일인터넷, 클라우드, 첨단소재, GPT, 로보틱스, 3D프린팅, 실시간 컴퓨팅 시뮬레이션 등은 첨단바이오 시장을 혁신할 ‘파괴적 기술’로 꼽힌다.

2023년 세계 의료시장 규모는 1조5570억 달러, 2027년에는 1조9170억 달러로 예상된다. 한국의 점유율은 1% 남짓이다. 세계 바이오헬스 시장 규모는 2600조원으로 반도체 시장의 세 배를 넘어섰다. 경쟁에 뒤질세라 우리 정부도 지난 6월 ‘제4차 생명공학육성 기본계획’에서 바이오산업 규모를 2020년 43조원에서 2030년까지 100조원 규모로 키우고, 미국 대비 기술 수준을 2020년 78%에서 2030년 85%로 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디지털 치료기기 15개 제품화, 알츠하이머 등 7개 난치질환 치료를 위한 전자약 핵심기술, AI 기반 신약 10개 후보물질 발굴, 차세대 신약 개발 플랫폼 등등 혁신 메뉴가 총망라돼 있다.

이 야심찬 계획을 현실화할 수 있는 동력은 융합형 인력이다. 그 양성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 초유의 의대 블랙홀 현상으로 초등 의대준비반이 개설되고, 유수 자연대와 공대 학생들이 해마다 수백 명씩 이탈하는 상황에서 임상의사 양성 위주 인프라로는 격변하는 미래에 대비할 수 없다. ‘혁신형 미래의료연구센터’ 지정 등 의과학 공동연구를 지원하는 미봉책으로 대비하기에는 융합혁신의 물결이 너무 거세고 빠르다.

바이오 강국으로의 청사진과 추진과제는 일단 정리된 듯하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어떻게 하는가’에 달렸다. 의료계 의견대로 교육과정 개편에 의한 기초의학과 연구 강화, 연구중심의대 사업 등 혁신안을 추진하되, 본격적 융합혁신 인프라 도입 등 전방위적 생태계 혁신이 필요하다. 이는 임상의료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4차 산업혁명의 격동기, 미래를 향한 개방과 혁신, 경쟁과 협력은 불가피하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매번 하던 대로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insanity)이다. 혁신이 아니다.” 위기는 기회와 함께 온다. 지금이야말로 의대 열풍을 의학 혁명의 추동력으로 삼는 기회로 만들어야 할 때다.

김명자 KAIST 이사장·전 환경부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