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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준봉의 시시각각

『제국의 위안부』 사태 읽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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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신준봉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준봉 문화디렉터

신준봉 문화디렉터

대법원 판정이 내려졌지만 개운하지만은 않다. 당장 판결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엇갈린다. 지난달 26일 대법원은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2심 유죄를 뒤집은 대법원 무죄 판결과 관련, 중앙일보의 지난 1일 자 박 교수 인터뷰 기사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곧 테러리스트 안중근·김구, 이런 책도 등장할 듯.” 이런 댓글도 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이면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박 교수를 옹호한 것으로 보인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지난달 27일 MBC 뉴스 영상에 달린 댓글은 박 교수 비판 일색이다. “대단한 대한민국 법원이다.” 가장 점잖은 댓글이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갈려 있나를 댓글들은 선명하게 보여 준다.

위안부 명예훼손 10년 만에 승소
“책 곳곳에 애매한 표현” 비판도
삭제 처분 34곳 되살려 읽게 해야

시장은 조금 움직인다. 『제국의 위안부』 출판사인 뿌리와이파리에 따르면 대법원 판결 직후 재고 300부가 소진됐다. 추가 인쇄에 들어갔다. 하지만 2013년 출간 이후 지금까지 판매 부수는 1만 권에 불과하다. 출간 이듬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 2015년 ‘문제 되는’ 대목 34곳을 삭제한 채 출간하라는 가처분이 내려진, 노이즈 마케팅 효과는 없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어쩌다 욕먹으며 안 팔리는 책이 됐나.

책을 욕하는 사람도 박 교수의 진정성을 대놓고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국내 위안부 논의를 운동단체들이 주도하다 보니 일본에 범죄 책임을 지운다는 지극히 어려운 목표 달성에 치우쳤고, 그 결과 한·일 두 나라 사이가 나빠졌다는 게 박 교수의 문제의식이다. 그런데 박 교수는 문학인이다. 번역자다. 일본 작가 야마다 에이미의 성장소설집 『풍장의 교실』을 감탄하며 읽은 적이 있다. 번역자가 박 교수였다. 좋은 번역소설은 원작이 우선 좋아야겠지만 번역이 뒷받침해 줘야 한다. 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에 쏟아진 좌파 지식인들의 비난 글들에 대한 반박 글을 모은 책 『「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한다』에서 인간과 문학을 이렇게 정의했다.

“문학이란 (…) 단일한 사고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심리와 감성을 가진 인간들이 만든 과거와 현재는 물론, 그 과거와 현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구조까지 고찰하려는 학문이기도 하다.”

이런 접근법으로 단일하면서도 극단적인 위안부상(像), 즉 “아직 어린 10대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노예처럼 성을 유린당한 조선의 소녀들”에 균열을 내려다보니 탈이 난다.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 어쩌다 싹트는 연애 감정, 심지어 "자발적인 매춘"으로 오해 살 만한 대목 등 조마조마하며 읽게 되는 문장들 말이다.

표현의 자유를 한껏 옹호한 대법원 결정이 박 교수에게는 타는 가뭄 끝 단비 같았겠다. 하지만 스포츠로 치면 이제 예선을 통과했다고 봐야 한다. 더욱 험난한 본선이 기다리고 있다. 시장에서의 성패(더 많이 팔려 여론을 얻어야 한다), 동료 학자들의 인정 말이다.

‘저자 박유하’에게 온정적인 사람들조차 『제국의 위안부』를 곱게 보지 않는다. 한 중진 문인은 “책의 전반적인 기조는 정당하지만 애매한 표현이 곳곳에 있다”고 했다. 박 교수의 입장은 결국 향후 건전한 한·일 관계를 위해서는 극단적 반일이라는 민족주의 프레임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한다는 거다. 하지만 탈민족주의 담론에 천착하는 한 인문학자의 반응은 신랄했다. “위안부 운동단체 같은 내셔널리스트들에게 훨씬 심각하고 복잡하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을 텐데 박유하가 이거냐, 저거냐의 단순한 싸움으로 만들어버려 판을 망가뜨렸다”는 것이다.

이런 시선이, 저자 박유하가 앞으로 넘어야 할 장애물이 아닐까.

박 교수 측은 삭제된 34곳을 되살리는 가처분 이의신청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 지금처럼 34곳이 ‘○○○○’ 처리돼 있어서는 비판하든, 편들든 『제국의 위안부』를 제대로 읽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