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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간 윤 대통령, 먼저 숙였다…文정부 비판도 통째 삭제 [view]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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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이후로 가장 편안하고 기쁜 날이 아닌가 생각한다.”

취임 후 세 번째 국회 방문이었던 31일 윤석열 대통령이 한 말이다. 약 3시간 40분간 이어진 대통령의 국회 체류 풍경은 지난 두 차례와는 확실히 달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나 대화하고, 본회의장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그와 악수하고, 나가면서 또 악수를 했다. 시정연설도 “민생과 국가발전을 위해 애쓰시는 김진표 국회의장님, 김영주ㆍ정우택 부의장님, 또 함께해주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님, 이정미 정의당 대표님,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님…”이라며 야당 대표를 먼저 호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편안하고 기쁜 날’이라고 인사했던 여야 원내대표 및 상임위원장과의 오찬 때 윤 대통령은 이야기를 듣는 데 몰두했다. 야당 위원장들이 홍범도와 서울~양평 고속도로, 삭감된 연구개발(R&D) 예산 등 민감한 주제를 꺼내들었지만, 윤 대통령은 계속 귀를 열었다. 거침 없는 태도로 대화의 주도권을 쥐려 하는 평소의 '윤석열 스타일'과는 대비됐다.

비윤계로 분류되는 국민의힘의 한 중진 의원이 내놓은 이날의 총평은 이랬다. "이 대표와 악수하고, 경청하려는 태도는 엄청난 변화 시그널이다. 대통령의 변화는 여당이 살아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인데, 오늘은 그런 모습을 느꼈다."

윤석열 대통령이 3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긴축재정 기조를 바탕으로 한 657조 규모의 내년 정부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기 위해 본회의장으로 입장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인사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3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긴축재정 기조를 바탕으로 한 657조 규모의 내년 정부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기 위해 본회의장으로 입장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인사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시정 연설 내용도 앞선 두 번과 달랐다. 전임 문재인 정부가 연설문 속에 등장하지 않았다. 앞선 두 연설 때 “정치적 목적이 앞선 방만한 재정 운용”(2022년 10월)이라거나 “북한과의 형식적 평화”(2022년 5월)라고 날을 세운 것과 딴판이었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번에도 참모들이 준비한 초안엔 전 정부의 방만 재정과 가계부채 방치, 어려움을 겪은 한·일 관계에 대한 지적이 담겼다. 하지만 윤 대통령 본인이 "지난 정부에 대한 언급은 싹 들어내라"고 지시했고, 직접 내용을 고쳤다고 한다. 전임 정부 얘기가 빠진 원고는 "대내외 경제 여건이 녹록지 않다”는 진단으로 시작했다. 27분간의 시정연설 대부분을 경제 문제에 할애하며 예산안 처리를 위한 국회의 초당적 협력을 당부했다. 가장 많이 쓴 단어도 경제(23회)였고, 정부와 국민(각 22회) 순이었다.  국회(10회)와 협력(8회), 협조(5회)도 자주 언급했다.  "세계 최대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과 금융, 세제 지원을 통해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의 초격차 확보를 위해 힘써왔으며, 그 과정에서 보여준 국회의 관심과 협조에도 감사드린다”라거나 “교권 보호 4법의 개정에 협조해주신 국회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는 표현도 담겼다. “글로벌 경제 불안과 안보 위협은 우리에게 거국적, 초당적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며 “당면한 복합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아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했다.

 몸은 낮췄지만, 시정 연설 속 국정 기조는 지금까지와 별로 차이가 없었다. "돈을 풀라"는 야당 주장에 맞서 건전 재정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방침을 재천명 한 게 대표적이다. 내년도 예산안의 총지출부터가 올해보다 2.8% 늘어난 656조9000억 원으로, 재정통계가 정비된 2005년 이후로 최소 증가 폭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3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긴축재정 기조를 바탕으로 한 657조 규모의 내년 정부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3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긴축재정 기조를 바탕으로 한 657조 규모의 내년 정부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윤 대통령은 “건전재정은 대내적으로는 물가 안정에, 대외적으로는 국가신인도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넘겨주지 않기 위한 것”이라며 “국제통화기금(IMF)이 우리의 건전재정 기조를 ‘옳은 방향’이라고 호평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순하게 지출을 줄이는 것이 아니고, 국민의 혈세를 낭비 없이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쓰자는 것”이라며 “이를 통해 마련된 재원은 국방, 법치, 교육, 보건 등 국가 본질 기능 강화와 약자 보호, 그리고 미래 성장 동력 확보에 더 투입하겠다”고 강조했다.

야당의 비판 타깃이 되고 있는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은 “민간과 시장에서 연구 개발 투자를 하기 어려운 기초 원천 기술과 차세대 기술 역량을 키우는 데 써야 하는 것”이라며 “첨단 AI(인공지능)ㆍ디지털ㆍ바이오ㆍ양자ㆍ우주ㆍ차세대 원자력 등에 대한 R&D 지원을 대폭 확대했다”고 주장했다. 나눠먹기식 R&D를 줄이고 가능성 있는 곳에 집중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에서 변화가 없었다.  그러면서 123만 기초수급 가구에 1조5000억 원 생계급여 추가 지급, 한 부모 가족 소득 기준을 완화로 3만2000명에게 추가 양육비 지원, 저소득층 대학생 67만 명의 장학금 평균 8% 인상 등 약자 복지는 소홀히 않겠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윤 대통령은 정책기조나 국정 방향의 변화 보다는 국회와 야당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에 방점을 뒀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의회를 존중하는 낮은 자세로 국회와 함께 경제ㆍ안보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의지가 담겼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 중진 의원들 사이에선 "윤 대통령이 지금과 같은 ‘정치의 실종’으로는 국정 운영에 한계가 있다고 인식하는 것 같다" "뭉친 실타래를 푸는 것은 궁극적으로 국정에 무한 책임이 있는 대통령의 몫인만큼 여러가지 고민이 느껴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당장 민주당은 노란봉투법과 방송법의 강행처리를 예고하고 있고, 여당은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요청할 방침이다. 이재명 대표가 역제안한 '대통령+여야 대표'의 3자 회담도 아직은 진전이 없다. 총선을 앞둔 여야의 대치 전선은 곳곳이 지뢰밭이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31일 하룻동안 국회에서 보여준 대통령의 화끈한 변신이 과연 지속될 것인가, 그리고 그 변신은 정치의 변화와 복원을 이끌 수 있을까. 대통령의 세번째 시정 연설이 있던 날 국회의 풍경은 국민들에게 아주 작은 희망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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