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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치솟을 것, 최소 10년 석유장사 활황" 중동전쟁에 웃는 그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중동전쟁이 글로벌 에너지 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전쟁 장기화로 수급 불균형이 커지면 “최악의 경우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대까지 치솟을 것”(세계은행·WB)이란 예측이 나오면서 꺼져가던 ‘석유 경제’에 다시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2030년이면 석유 수요가 정점에 이를 것”(국제에너지기구·IEA)이란 기존 전망을 비웃듯 미국의 슈퍼메이저 업체들이 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 ‘빅딜’에 나서며 몸집을 부풀리는 배경으로 지목된다.

엑손모빌이 인수합병한 파이오니어 내추럴 리소시스가 미국 뉴멕시코 에디 카운티의 로코 힐스 근처에서 셰일오일을 생산하는 모습. AFP=연합뉴스

엑손모빌이 인수합병한 파이오니어 내추럴 리소시스가 미국 뉴멕시코 에디 카운티의 로코 힐스 근처에서 셰일오일을 생산하는 모습. AFP=연합뉴스

30일(현지시간) WB는 ‘원자재 시장 전망’ 보고서를 통해 현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봤다. 보고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혼란에 더해 중동에서 분쟁이 격화하면 유가 전망이 급속히 악화할 수 있다”며 “1973년 아랍 국가들이 석유 수출을 중단했던 수준(제1차 석유 위기)의 대규모 혼란 상황이 오면 내년 유가가 당초 전망(90달러)보다 56~75% 높은 배럴당 140~157달러에 이를 수 있다”고 밝혔다. 중동산 석유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다시 한번 ‘석유 파동’이 닥칠 수 있다는 경고다.

이런 전망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에 닥친 에너지 공급 위기를 발판 삼아 역대 최대의 수익을 거뒀던 미국 에너지 업체들에 호재로 다가오고 있다. 당장 생산량 기준 업계 1·2위인 엑손모빌과 쉐브론이 이달 들어 경쟁적으로 초대형 인수합병(M&A)에 들어갔다. 엑손모빌은 지난 11일 미국 셰일오일 업체인 파이오니어 내추럴 리소시스(PND)를 595억 달러(약 80조 2238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뒤질세라 쉐브론도 지난 23일 경쟁 업체인 헤스(HESS)를 530억 달러(약 71조 4600억원)에 사들이기로 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전세계적 감염병 유행)에 따른 경기 위축 등의 여파로 신규 유전·가스전 개발사업을 줄줄이 중단했던 움직임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실제로 엑손모빌은 사업성이 떨어졌다며 연기했던 모잠비크의 로부마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프로젝트를 지난해 말부터 재가동했다. 올해 들어선 당초 계획보다 생산량을 올려잡았을 정도다.

쉐브론이 남미 가이아나 앞바다의 심해유전 지분이 많은 헤스를 전격 인수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2019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원유를 생산하기 시작한 신생 산유국인 가이아나의 전체 원유 매장량은 80억 배럴(추정치)에 달하지만, 저유가 국면에선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메이저 업체들이 ‘석유 쟁탈전’을 벌이면서 가이아나 심해유전도 다시 각광받는 모습이다.

"최소 10년은 석유 장사 활황"

이런 상황 전개에 공신력 있는 국제기구의 중·장기 전망도 빛이 바랜 분위기다. IEA는 지난 24일 발표한 ‘세계 에너지 전망 2023’ 보고서를 통해 “태양열·풍력·전기자동차 등 청정에너지 기술의 획기적인 부상으로 2030년께 글로벌 에너지 시스템이 매우 달라질 것”이라며 “(석유를 포함해) 수십년간 80%대를 차지하던 화석연료 비중이 73%까지 줄어드는 등 2030년에는 (석유)수요가 정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IEA의 이런 예측에는 “2050년 탄소 중립을 기정사실로 놓고 역산한 모델”(니혼게이자이신문)이란 맹점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히려 미국 메이저 업체들은 “2050년까지 석유 수요가 계속 팽창할 것으로 내심 기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분석에 힘을 싣는 것은 ‘인구 대국’ 인도와 중국의 탄소중립 시간표다. 중국은 2060년, 인도는 2070년에야 “화석연료 사용을 줄여 탄소 순배출량을 제로(0)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전문가 사이에선 “분쟁이 늘어나는 등 지정학적 불안정성이 계속 커지고, 석유 경제가 훨씬 더 오래갈 것이란 판단이 작용하면서 메이저 업체들이 더욱 공격적으로 석유·천연가스 개발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글로벌 에너지 전문가인 백근욱 전 옥스퍼드에너지연구소(OIES) 선임연구원은 “빅 플레이어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수익 극대화를 노리던 상황에서 중동 전쟁이 M&A를 더욱 가속화시킨 측면이 있다”며 “앞으로 적어도 10년은 석유 장사가 활황을 보일 것으로 보고 베팅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 상황 반면교사 삼아야"

이처럼 세계 에너지산업이 요동을 치는 데도 한국이 너무 손을 놓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와 관련, 익명을 요구한 국책기관 연구원은 “문재인 정부 당시 신규 원전을 중단하고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집중 투자하면서 에너지 생태계 자체가 많이 훼손됐다”며 “‘넷 제로(탄소배출량 저감)’에 집착하다가 미국에 선수를 뺏긴 유럽의 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엑손모빌과 쉐브론을 필두로 한 미국 업체들이 빠르게 몸집을 키우는 데도 로열더치셸, BP, 토탈 등 유럽 메이저 업체들은 신규 대형 유전 개발에 제대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백근욱 박사는 “유럽 주요국 정부와 유럽연합(EU) 차원에서 금융기관들이 화석연료 개발사업에 더는 투자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압박하면서 자금이 돌지 않고 있다”며 “결국 유럽 메이저 업체들이 신재생에너지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채산성이 악화하는 국면”이라고 진단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급속한 신재생에너지 증가가 고유가 국면에서 에너지 위기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진은 지난해 9월 11일 오후 집중호우로 인한 산사태 피해를 입은 충북 제천시 대랑동의 한 태양광 발전시설 모습. 뉴스1

문재인 정부 시절 급속한 신재생에너지 증가가 고유가 국면에서 에너지 위기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진은 지난해 9월 11일 오후 집중호우로 인한 산사태 피해를 입은 충북 제천시 대랑동의 한 태양광 발전시설 모습. 뉴스1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하는 일관성 없는 에너지정책으로 에너지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에너지 수급 사정이 비슷한 일본의 경우 석유·천연가스 자주개발율(에너지 수입 총량 대비 국내 업체가 국내외에서 개발·생산해 확보한 에너지 비율)은 2009년 23.1%에서 2020년 40.6%까지 꾸준히 올랐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여파로 줄긴 했으나 여전히 33.4% 수준이다.

반면 한국의 자주개발율은 2015년 16%로 정점을 찍은 뒤 계속 하락해 지난해에는 10.5%까지 떨어진 상황이다. 권원순 한국외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 정부가 사우디아라비아 원유 530만 배럴을 국내에 비축하고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우선 구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협상에 성공한 것은 좋은 사례”라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원유·천연가스 시장의 불안정성 등 외부적 위협 요인에 대비해 일본처럼 적극적으로 해외 개발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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