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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염재호 칼럼

분노의 정치와 공감의 정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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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영화감독 제임스 스턴의 다큐멘터리 영화 ‘아메리칸 카오스’를 최근에 보았다. 오바마 대통령을 좋아하고 로버트 케네디를 최고의 정치가로 존경하는 스턴 감독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주류도 아닌 정치 신인 트럼프가 약진하는 것을 보고 미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트럼프 열풍이 미국 사회를 휩쓸고, 심지어 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조차도 트럼프 지지로 쏠리는지 스턴에게는 의문투성이였다.

선거 6개월 전부터 아무런 편견 없이 트럼프 지지자들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 결과 자신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던 유권자 집단의 분노가 트럼프 지지로 몰린 것을 확인했다. 1960~70년대 최고의 부와 행복을 구가하던 시절의 미국은 막을 내렸다. 빈부격차는 심화하고 전통적 가치는 훼손되고 가족의 행복은 파괴되는 현실에서 미국 중산층의 정치적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의 삶은 힘들었지만 경제적 부를 가정에 안겨줄 수 있었다. 하지만 기후위기로 석탄소비를 억제하는 바람에 탄광이 문을 닫고 가정과 마을이 붕괴하는 현실에 정치권이나 정부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민주당의 환경 정책, 이민 정책, 성소수자 정책 등 진보적 정책들이 자신들의 삶을 파괴했다고 믿기 시작한 백인 중산층이 분노하여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것이다. 트럼프가 거침없이 이들의 분노를 대변하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포퓰리즘 정치 캠페인을 하자 자신들의 아픔을 기성 정치인이 아니라 트럼프만이 공감하고 있다고 굳게 믿은 것이다.

삶의 피폐로 고통 받는 소외집단
공감 못하는 정치권에 분노 표출
분노 정치로 극단 정치세력 득세
공감의 정치로 분노 집단 품어야

스턴 감독의 생각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환경 정책은 우리가 당연히 감내해야 할 합리적 정책이다. 그리고 많은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남미 이민자들이 이민 국가인 미국에 정착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백인 중산층이 소멸하는 것을 방관한 정치권에 대한 분노 감정이 축적된 사실을 깨달았다. 민주당의 인권, 환경, 세계화, 민주화 등은 이들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공허한 헛소리에 불과했다. 엘리트 힐러리는 기득권 정치인으로서 트럼프를 비합리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비난만 했지 자신들의 분노를 이해 못 했다. 합리적 이념이나 가치의 정당성을 아무리 설파해봤자 삶이 파괴된 집단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는다.

우리도 세월호 참사로 분노한 가족들의 마음을 박근혜 정부는 공감하지 못했다. 이에 반해 야당과 운동권 정치세력은 이런 분노집단과 젊은 세대의 아픔을 간파하고 이를 정치화하는 데 성공했다. 청년들의 소득불균형 문제를 자극한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는 책이 나왔고, 청년실업은 늘고 고령화 사회에 노년층 부양의무까지 짊어져야 하는 청년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헬조선’을 입에 올리게 했다. 결국 분노의 정서가 모여 소위 촛불혁명까지 일어난 것이다.

분노의 정치는 또 다른 분노의 정치를 생산해낸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 양극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국회에서 정치인들의 논쟁을 보면 서로 분노를 자극하는 말싸움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스 철학자 손병석 교수의 저서 『고대 희랍·로마의 분노론』을 보면 분노는 상대편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 강화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법정 변론에서 보여준 ‘메갈레고리아’라는 수사학적 말하기 방식 때문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불경건죄와 아테네 청년 타락죄로 기소된 법정에서 청중을 경멸하는 모욕적인 말하기 태도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결국 이것이 아테네 배심원단의 분노를 야기하는 ‘실패한 설득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극단적 정치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이들은 분노를 자극하여 또 다른 분노를 일으키는 정치판을 만들고 있다. 손병석 교수는 “고대 희랍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분노를 제거하거나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적합하게 표출하고 분노를 순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의 여부”라고 설명한다. 결국 분노한 집단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정치 역량과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원로 석학 김우창 교수의 집담회 때 일이다. 리더가 조직을 위해 구조조정이 필요할 때 희생당할 조직원들을 고려해 이를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고 질문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김우창 교수는 조직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면 해야 되겠지만, 리더는 구조조정 당한 사람의 아픈 마음도 읽을 줄 아는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고 담담히 답을 했다.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고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우리는 작은 이익이나 권리의 침해에도 불공정하다고 쉽게 분노한다. 정치권은 이 분노의 마음을 자극하여 정치적 이익을 얻을 것이 아니라 분노의 마음에 공감할 줄 아는 정치를 해야 한다. 내년 총선에서도 중도층의 마음은 분노의 정치보다는 공감의 정치를 하는 정당으로 기울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