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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시각각

돈 크라이 포 미, 아르헨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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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정말 드라마 같다. 외신이 전하는 아르헨티나 대선 소식을 혀를 끌끌 차면서 지켜봤다. 지난 8월 대선 예비선거에서 경제학자 출신의 하비에르 밀레이 하원의원이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페론주의 정부의 현직 경제장관인 세르히오 마사는 3위에 그쳤다. 밀레이는 극우 자유지상주의자다. 중앙은행을 폐지하고 미국 달러를 공식 법정 통화로 채택하겠다고 약속했고, 심지어 장기 매매를 합법화하겠다는 극단적인 공약까지 내놓았다. 오죽하면 외신이 ‘무정부 자본주의자(anarcho-capitalist)’라고 부를까.

끈질긴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
불평등 관리 실패하면 방심 못해
한국, 총선용 현금성 정책 경계를

밀레이는 정부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15%만큼 줄이고 18개 부처 중 10개 부처를 폐쇄하겠다고 공약했다. 방만한 재정을 수술하겠다며 전기톱을 들고 유세에 나섰다. 50대의 독신이면서 밀턴 프리드먼과 로버트 루커스 등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이름을 붙인 개들을 자식처럼 키운다. 기행과 거친 언사 탓에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로 불린다.

지난주 대선 결과는 다시 뒤집혔다. 마사가 37%를 득표해 1위, 밀레이는 30%로 2위였다. 두 후보는 내달 결선에서 다시 격돌한다. 그나마 합리적인 중도우파 후보 파트리시아 불리치는 24% 득표에 그쳐 탈락했다. “최악의 대선 결과”(영국 이코노미스트)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인플레이션이 연 138%에 달하고 현지 통화인 페소의 가치가 최근 4년간 95%나 폭락했는데도 여당 후보가 선두를 차지해서다. 경제가 폭망하면 집권세력에 불리하다는 선거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포퓰리즘은 역시 힘이 셌다. 마사의 정부는 99%의 근로자에게 소득세를 깎아주고, 연금생활자에겐 공식 환율로 100달러 수준의 페소 보너스를 뿌렸으며, 식료품 부가세 일부도 환급해 줬다. 선거용으로 그렇게 퍼부은 돈이 GDP의 1%에 달했다. 집권 프리미엄을 살려 정부가 할 수 있는 돈 풀기에 조직적으로 나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430억 달러의 빚을 갚아야 하는 거덜난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아예 노골적인 매표 행위도 있었다. 빈곤층 동네에는 냉장고 같은 선물이 뿌려졌다. 자유주의 후보가 당선되면 지하철 등 공공요금이 급등할 것이라는 정부의 공포 분위기 조성도 한몫했다. 그 와중에 밀레이의 거친 입은 표를 날리는 데 일조했다. 국민의 3분의 2가 가톨릭인데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을 향해 “좌파 개××”라는 막말을 던졌다.

불리치와 중도우파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이 밀레이 지지를 선언했다. 반(反)페로니즘 연합전선이 결성됐지만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 페로니즘의 유혹을 아르헨티나 국민은 참아낼 수 있을까. 설령 그런들 독불장군 스타일의 자유지상주의 경제학자가 국민을 통합하며 고통스러운 개혁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포퓰리즘은 아르헨티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증기기관과 전기, 컴퓨터와 인터넷, 인공지능과 로봇처럼 경제와 사회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범용 기술이 도입될 때마다 경제 불평등이 커졌다. 이로 인한 사회 갈등을 정부가 잘 조율하지 못하는 나라를 포퓰리즘이 노린다.

건전 재정을 강조해 온 윤석열 정부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현금성 정책이 여당발로 나왔다. 이장·통장 수당을 월 30만원에서 내년부터 40만원으로 올려주잔다. 세수는 줄어드는데 연간 1381억원이 더 들어간다. 문재인 정부 때 자격 확인도 없이 급하게 선지급한 1, 2차 재난지원금 8000억여원도 환수를 안 하기로 당정이 결정했다. 영세 소상공인의 어려움을 고려한 고육책이겠지만 그만큼 국민 부담이 늘었다.

뮤지컬 ‘에비타’는 페로니즘의 원조인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전 대통령의 부인 에바 페론의 삶을 그렸다. 주인공은 ‘아르헨티나여 울지 마라(Don’t cry for me Argentina)’고 열창했지만 아르헨티나 국민의 눈물이 포퓰리즘으로 닦일 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