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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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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확히 10년 전 이맘때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 뇌리에 각인된 사건 말이다. 2013년 10월 21일 윤석열 당시 여주지청장은 서울고검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 자리에서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당시의 외압을 폭로했다.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이 “사람(채동욱 전 검찰총장)에게 충성하는 것이냐”고 거칠게 몰아붙이자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이 발언으로 그는 전 국민적 스타가 됐다.

예나 지금이나 윤 대통령은 여전히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었을 때도 최고 권력에 맞서 싸우다 옷을 벗었다. 권세와 시류에 휘둘리지 않는 강철 같은 뚝심은 그를 대통령으로까지 만들었다. 대선후보 시절 윤 대통령이 말했듯 그가 충성하는 대상은 오직 국민뿐이다. “국민만이 나라의 진짜 주인”(2021년 6월 29일)이며, “위정자는 국민의 머슴”(2022년 3월 7일)이다.

여당의 최대 숙제는 권력균형
대통령보다 자유·법치가 우선
총선서 지면 추종자부터 배신

그러나 여당 국회의원들은 대통령과 생각이 다른 것 같다. ‘사람에게만 충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공천을 둘러싼 ‘윤심’에 쏠려 있고, 당원 투표로만 대표를 선출토록 규정까지 바꾸면서 중간지대에서 멀어졌다. 중도·청년층으로 확장해 대선에서 승리했었지만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결과에서 보듯 불과 1년 반 만에 이들의 표를 모두 잃어버렸다.

뼈를 깎는 혁신이 없다면 내년 총선 결과도 불 보듯 뻔하다. 더불어민주당에 포진한 586 정치인들의 위선적 정의와 강성 팬덤을 앞세운 극단정치에 질린 유권자들도 ‘윤심’ 바라기의 여권 정치인들에겐 매력을 못 느낀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오직 “자나 깨나 국민을 위하며”(2022년 3월 7일) “국민의 안전과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하는”(2021년 7월 21일) 모습을 보일 때만 떠나버린 유권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이 뜻한 국민에 대한 충성은 무엇일까. 그동안 했던 말을 종합해 보면, 그의 충성 대상은 국민 개개인이라는 인격체보다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와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에 가깝다. 곧 자유민주주의다.

민주정(democracy)은 다수의 선진국이 채택한 정치체제로 국민이 주인이다. 직접선거로 대표를 뽑고, 중요한 의사결정은 다수결로 한다. 하지만 민주정엔 다수의 횡포라는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으며, 선거 결과를 인민의 총의로 왜곡하는 포퓰리즘 세력도 존재한다.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독배처럼 다수의 잘못된 판단이 사회 전체를 위기로 몬다. 그렇기에 다양한 의견과 소수의 생각을 존중하는 자유주의와의 결합이 필수다.

이는 검찰총장 시절부터 윤 대통령이 누누이 강조해온 법치주의 이념과도 같다. 특히 2020년 12월 법원의 검찰총장 업무 복귀 결정 직후 그는 평소 자주 쓰던 헌법·공정 등 표현 대신 ‘상식’이란 단어를 앞세웠다. 『상식(Common Sense)』은 미국의 독립혁명 사상가인 토머스 페인의 저서로,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제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말했던 ‘법의 지배(rule of law)’와도 일맥상통한다.

‘법의 지배’는 권력자가 임의로 법을 해석·집행하거나 시민을 통제하지 않고, 오직 국민이 합의한 법에 의해서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권력은 호시탐탐 법치를 무너뜨리고 제멋대로 하려고 하지만, 이를 막기 위해 입법·행정·사법권을 나누고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따라 서로를 감시한다.(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독립된 검찰과 감사원의 존재도 정부 권력의 폭주를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라거나 “검찰총장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는 말에 담긴 윤 대통령의 철학은 견제와 균형에 입각한 3권 분립의 정신을 보여준다. 여당 정치인으로서 대통령과 국민을 위하는 최선의 길은 무조건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고 추종하는 게 아니라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전하고, 헌법기관으로서 정부와 의회 간의 권력적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하지만 여당 정치인 중에 그런 이가 얼마나 될까. 10년 전 윤석열 당시 여주지청장과 같은 기개까진 아니어도, 진심으로 대통령의 철학에 공감하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여당이 ‘여의도 출장소’란 소리까진 듣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내년 총선에서 참패하고 조금이라도 대통령의 리더십이 흔들린다면, 가장 먼저 배신할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윤심을 추종했던 이들이다. 대통령의 뜻처럼 자유주의와 법치주의가 빚어낸 헌법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일상의 정치과정에서 이를 실현하는 정치인이 많아져야만, 여당과 이 정부에도 미래가 있다.

글=윤석만 논설위원 그림=윤지수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