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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윤의 내 친구, 중국인] ‘수치심 문화’와 ‘죄의식 문화’

중앙일보

입력

기독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서양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는 사건과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 속죄양이 되신 십자가의 희생으로 비롯된 원죄(原罪)의식, 즉 죄의식 문화를 가지고 있다. 셔터스톡

기독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서양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는 사건과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 속죄양이 되신 십자가의 희생으로 비롯된 원죄(原罪)의식, 즉 죄의식 문화를 가지고 있다. 셔터스톡

’죄의식 문화’와 ‘수치심 문화’는 동서양의 문화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다. 죄의식 문화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타인의 시선과 상관없이)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다. 수치심 문화는 ‘상대방이 자신의 행동을 알게 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전자는 서양을, 후자는 동양 문화의 특징이라고 한다. (후자의 입장에서 불편할 수도 있는 예를 들어) 풀어 보면, 수치심 문화의 구성원들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다. 나의 실수를 남들이 모른다면 그다지 힘들어하지 않는다. 반면에, 죄의식 문화에서는 내가 실수를 했다면 남들의 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괴로워한다.

기독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서양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는 사건과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 속죄양이 되신 십자가의 희생으로 비롯된 원죄(原罪)의식, 즉 죄의식 문화이다. 나의 잘못된 행동과 생각에 대해 다른 누구는 몰라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아신다. 그리고 사실 '나도 대부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절제한다. 자신의 기준과 판단을 가지고 행동한다. 때로는 스크루지 영감 같은 인색한 욕심장이의 출현도 가능하다.

수치심 문화에서는 남을 의식한다. 드러난 것에는 민감하게 신경을 쓴다. 그러다 보니, ‘굳이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장소에서의 도덕성이 부족하다. ‘모르는 이’ 즉 제3자에 대한 배려도 약하다. 새치기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등등 공중도덕이 부족하다. 반면에, 스크루지 같이 주위에 인색한 이는 별로 없다. 욕심장이는 있어도, 남들한테 인색하다는 비판은 ‘수치’스럽기 때문에 인색하게 보이는 행동은 조심하는 경향이 있다.

‘수치심 문화’에서의 경영 현장

수치심 문화는 체면 문화와 뿌리 깊은 관계가 있다.

죄의식 문화가 자율성이 강한 반면, 수치심 문화는 타율적이다. ‘그 정도는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하겠지’라는 안일한 업무 지시나 (“굳이 그런 사소한 것까지 언급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간단히 작성한 ‘작업 시방서’를 가지고 중국에서 경영하다 보면, 반드시 황당한 일을 겪게 된다. ‘우리 기준으로 볼 때, 스스로 판단하도록 맡길 수 있다’고 여기는 영역에서는 한 번쯤은 고민을 해봐야 한다.

수치심 문화는 중국 특유의 체면 문화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유교가 중요시하는 수치심은 사회화 과정을 거쳐 ‘체면 문화’로 구현되었다. 중국 문화 속에서 ‘체면’은 너무도 중요하고 민감하다. 내 체면이 깎이면 즉 내가 수치를 느껴도 안 되지만, 동시에 남에게 수치감을 줘서도 절대 안 된다.

우리나라의 중국 법인에 크게 걸려 있는 한국 본사의 경영이념, 방침 등의 번역은 (필자의 경험상) 반드시 창피할 만큼의 잘못된 번역이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번역을, 검토해 보라고 다른 중국인 직원에게 지시를 해봐야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原) 번역자의 체면을 고려해서이다. 중요한 문건의 작성에서도 이런 현상은 예외 없이 발생한다. ‘믿고 맡기’는 것도 좋지만, 문화의 특성을 고려해서, 내가 꼼꼼히 보던지, 아니면 ‘제3자’에게 ‘딴 생각 말고 꼼꼼히 봐 달라’고 ‘신신당부’해야 한다.

예전에 벼슬길에 오르는 자식을 염려한 아버지가 집을 떠나는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아, 누가 네 얼굴에 침을 뱉는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냐?” 아들은 아버지가 말하려는 교훈을 이미 알아듣고, 모욕감을 참고 조용히 침을 닦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또 말한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러면 안된다. 네가 침을 바로 닦는다면, 그 침을 뱉은 사람의 체면은 뭐가 되느냐? 침이 마를 때까지 절대 닦지 말아야 한다!”

〈국화와 칼〉과 〈후흑학(厚黑學)〉

서양인이 쓴 최초의 본격적인 일본인론(論)이라고 할 수 있는 〈국화와 칼〉에서 저자인 루스 베네딕트 여사는, 일본의 독특한 문화를 ‘수치심 문화’로 소개했다. 동양에 대한 서구의 시각은 일본과 ‘한국 및 중국 등’을 동일시하는 오류가 종종 있어왔지만, 서구에 비해 ‘동양은 수치심 문화’라는 지적은 적절하다.

〈대학(大學)〉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잘 알려진 문구다. 그런데 원문 중 앞부분에는 수신(修身)을 위해서는 ‘정심(正心)과 성의(誠意)’ 등을 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생각이 성실해야 하고, 마음을 바르게’한 후에야 비로소 수신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앞의 구절은 쏙 빼고 ‘수신’으로 시작한다고 알고 있다. 원문의 시작이 원래 이렇게 시작되었는 것보다는, 그 문화 속에서 살아온 후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렇게 수용해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정심과 성의’, 즉 ‘마음과 생각’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수신’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행동 등은 드러나고 보이므로 그래서 중요하다. 한편, 수신이 부족하다고 보이면, 체면이 깎인다. 수치스럽다.

“평판은 누군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라 서로를 통제하는 데 쓰는 수단이다. 겉으론 척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회초리다……. 우리의 평판은 다른 사람의 것이다(〈무엇이 우리의 관계를 조종하는가(평판의 힘)〉 존 휘트필드)  

좋은 평판은 소위 세상적인 ‘성공’에 유리하다. 성공한 이들이 진(眞)면목 또한 그만큼 뛰어난 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수치심 문화’로 집약할 수 있는 유교권 문화에서는 ‘성의 정심 수신…’이 아니라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수용하고) 기억해 왔다. 치국 평천하의 영웅(혹은 위인)이 되려는 자라면, (마음과 생각이란 그 진실됨과 깊이를 알 수 없으니) 최소한 겉으로 잘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로의 해석도 가능하다. 중국 근현대사의 저명한 철학가인 이종오(李宗吾. 1879~1943)는 ‘후흑학(厚黑学)’을 설파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임금들과 영웅호걸은 뛰어난 인성(人性)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사실 ‘후흑(面厚.心黑, 얼굴이 두껍고 속이 검은)한 사람들’이라고 지적한다.

중국인들은 정말 노답(no答)인 이들을 손가락질하며 하는 말들이 있다. “真丢脸(정말 체면을 깎는다. 망신스럽다)”, “人无廉耻,万事可为(염치가 없는 이들이라면, 뭐든 한다)”, “只要老脸皮,天下无难事(얼굴이 두껍기만 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하나도 없다)”라고들 한다. 수치심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수치심이 없으면, 온갖 나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인간이라면 최소한 ‘수치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중국에서 ‘왕빠딴’은 왜 가장 심한 욕인가?

중국말 중 ‘왕빠딴’이란 욕이 있다. 중국어에 입문할 때, 아마도 가장 먼저 배우는 욕일 것이다. 여러 설이 있지만 ‘망팔단(忘八端, 여덟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을 잊다)’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팔단은 유가(儒家)가 중요하게 여기는 8가지 품성이다. ‘효(孝, 효도), 체(悌, 형제와 이웃 공경), 충(忠, 충성), 신(信, 신의), 예(禮, 예의), 의(義, 의리), 염(廉, 바름), 치(恥, 수치)’를 말한다. 이 8 가지를 모르는 이가 ‘왕빠딴’이다. 마침 8번째에 치(수치)가 있으므로 ‘8번째인 수치심’을 모르면 정말 인간도 아니다라고도 한다. “당신은 왕빠딴이야!”라는 말은, 결국 “너는 인간으로서의 기본 품성이 없어”, “너는 사람도 아니야”라는 욕이다.

你中有我, 我中有你(네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네가 있다)

대부분의 문화에는 ‘수치심 문화’와 ‘죄의식 문화’가 혼재되어 있다.

어느 사회나 그리고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수치심 혹은 죄의식 문화 중 하나의 기준에 맞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수치심 문화’에도 자율적인 절제가 있다. 신독(慎独. 홀로 있을 때도 언행을 삼감)은 바로 좋은 예다.

서구의 ‘죄의식 문화’에서도 “만약 남들이 모르면….”하는 남들을 의식하는 ‘수치심 문화’적 요소(또는 본능)가 있다.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및 〈할로우맨〉등의 영화와 고대 서구의 전설에서는 투명인간이 등장한다. 한편 중국의 무협의 세계에서 하늘을 나르고 맨손으로 장풍(掌風)을 쏘고 검의 기운만으로 사방을 초토화시키는 어마어마한 무공(武功)은 있지만, ‘투명’해지는 신공(神功)을 익힌 무협고수에 대해서는 (적어도 필자는) 들어본 적이 없다.

수치심이냐 죄의식 문화냐라는 이원적인 분류 기준은 자체적으로 논리가 탄탄해 보이지 않는다. 이론과 논리는 차치하고 현실사회에서, 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스스로 절제하며 타인을 의식하고 배려하는 높은 도덕의식은 추구해야 할 미덕이다. 그 지향점이 너무 높아서 각 개인들마다 이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양심 즉, ‘수치심’은 절대적으로 갖춰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미 성취한 제도가 아니다(김누리 교수)”

중국의 체제와 중국인에 대해 이런저런 용어를 사용해 비판할 수는 있겠다. 자유, 인권, 독재, 탄압, 여론 통제, 부패, 무질서 등이 그것들이다. 한편, 우리가 그렇게 비난할 자격이 있나 싶기도 하다. 중국 친구들이 거꾸로, 우리나라의 관련 화제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필자 역시 그들에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무례 사회는 돈만 벌 수 있다면 인격 모독 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 이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 집단의 인식은 지극히 천박하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자를 ‘모범생’으로 길러내는 무례 사회에 미래는 없다…. 열등생의 자아가 모멸감에 의해 손상된다면, 우등생의 자아는 오만함에 의해 왜곡된다…민주주의는 이미 성취한 제도가 아니라, 시민이 하루하루 채워가야 할 숙제다(〈우리에게는 절망할 권리가 없다〉 김누리)”

자유민주주의의 ‘자유’와 ‘민주’는 그 자체로 숭고하다. 하지만, 이 제도를 완전체로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특히 기득권층) 공감하고 공유하는 상식은 필수적이며, 제도적 보완과 견제가 필요하다. 청문회가 그 중 하나다.

중국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오니, 국내의 소식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얼마 전에는 인사청문회와 국정감사를 보게 되었는데, 황당함을 넘어서 화를 삭힐 수가 없었다. 반복되고 번복되는 거짓말과 뻔뻔함, 몰염치로 무장한 채 작정하고 우겨대는 모습이었다. 그 중의 압권은 청문회장에서 후보자가 줄행랑치는 장면이었다.

필자는 정치적으로는 늘 중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국민이 보고 있을 청문회에서의 ‘도망’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리 포용하고 양보하고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 진짜…”인 짜증에서, 이내 “아 진짜, 국민을 뭐로 보고…”하는 분노가 치밀었다. 마치 필자의 면전에 대고 무시하는 듯한 모욕감을 느꼈다. 오죽하면, 줄행랑 보다 잽싼 ‘김행랑’이라는 신조어가 나온다는 말인가

‘줄행랑’은 알겠는데, ‘김행랑’은 뭡니까?

중국 친구의 질문이다. 사전에 없는 표현이라 설명해주기가 쉽지 않았다.

그보다도…. 설명하는 도중에 부끄럽고 창피해서, 수치심을 느꼈다.

‘줄행랑을 치다(혹은 ‘놓다’)’라는 말이 있다. 필자가 들었던 해석을 소개한다. 주로 불리한 상황에서 도망가는 것을 의미한다. ‘줄행랑’은 대문간에 줄처럼 길게 이어져 있는 문간채를 말한다. 예전에 부잣집일수록 대문을 중심으로 행랑채가 여럿이 있었다. 여기에는 주로 하인들이 거처했는데, 도둑은 물건을 훔친 후 문밖을 나와서는 담벽에 길게 이어져 있는 행랑채를 통과해야 한다. 느릿느릿 여유 부리다가, 어느 행랑채의 창문이 열려 있어서 들키면 큰일이다. 그래서, 이 행랑채를 통과하려면 재빠르게 달음박질해야 한다. 그래서 ‘줄행랑치다’는 (다른 해석도 있겠지만) 불리한 상황에서 재빠르게 도망가는 모습을 형용한다.

줄행랑은 대체로 가치 중립이다. 하지만, 최근의 신조어인 ‘김행랑’에는 ‘뻔뻔함, 몰염치, 거짓, 기만, 비겁…’등이 몇 겹으로 덧칠되어 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내 뱉는 “내 (거짓)말을 왜 안 믿어요?”라는 무성의하고 무시 및 멸시적인 태도는, 바로 ‘수치를 잊은 자’의 모습이었다.

일부 정치하는 자들의 몰염치가 횡행할수록, 수치스러움과 부끄러움은 그만큼 우리들의 몫이 되었다. 굳이 분류하면, 우리 문화는 서양과 비교해서 ‘수치심 문화’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수치심도 없는 이들이라면,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일까? 도대체 어느 나라의 공무원들일까?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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