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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찬의 인프라

직장 경험 없는 청년, 취업 공포로 내모는 ‘중고 신입’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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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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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중고 신입’. 신입 사원이지만 신입답지 않게 곧잘 일하는 인재라는 의미다. 채용 방식이 수시·경력 위주, 즉 필요할 때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나온 신조어다. 직무 역량이 중요해졌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한데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에겐 이런 채용 방식이 재앙에 가깝다. 학교에서 공부만 했지, 실전 경험이 없어서다. 관련 경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취업 시장에 나오자마자 좌절할 수밖에 없다. 하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보면, 나이는 차고, 경력 형성은 가물가물해진다. 실패가 쌓이면서 포기에까지 이르는 악순환이 노동시장에서 벌어지는 현재 청년들의 처지다. 청년이 바라는 취업 서비스 1위가 ‘직무 경험과 경력 개발 기회를 확대해주면 좋겠다’(73.7%, 중소기업중앙회)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기업 인턴, 채용 수단으로 변질
공공 인턴, 실적 채우기로 둔갑
직무 경험 쌓을 기회 거의 없어
청년에 일 경험할 문호 넓혀야

‘티슈인턴’ ‘복사인턴’에 좌절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지난 5월 ‘미래내일 일경험’ 발대식에서 청년에게 직무경험의 장을 넓히도록 기업인에게 당부했다. [연합뉴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지난 5월 ‘미래내일 일경험’ 발대식에서 청년에게 직무경험의 장을 넓히도록 기업인에게 당부했다. [연합뉴스]

지난 정부에서 직장 체험 프로그램을 도입했지만, 직무 경력 개발과는 거리가 멀었다. 2~3일짜리 견학에 지나지 않았다. 기껏 내놓은 청년 대책은 단기 실업 해소에 방점을 찍은, 인스턴트 정책일 뿐이었다. 실효가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빈 강의실 불 끄기’라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이러다 보니 ‘티슈 인턴(티슈처럼 뽑아 쓰고 버린다)’이라는 푸념 가득한 신조어까지 나왔다.

그나마 활성화한 기업의 인턴제는 청년의 직무 탐색이나 역량 개발보다 채용 과정의 일환으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른바 채용형 인턴이다. 역량 검증의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뜻이다. ‘비정규직 노동의 예행 과정’으로 변질한 꼴이다.

여기에 정부도 맞장구를 쳤다. 인건비 지원에 방점을 찍으면서다. 산업 현장에선 일경험보다 단기 노동력 활용으로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열정 페이’와 같은 부당한 대우, 다쳐도 산재보험 가입을 안 해 보상과 지원의 사각지대에 방치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산업계가 자체 규정을 만들어 기업이 소요 재정의 대부분을 확보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스위스와 같은 선진국의 일경험 프로그램과 대조적이다.

공공부문 인턴도 마찬가지다. 개별 부처에서 제각기 추진하는 바람에 통합 관리체계가 없어 주먹구구식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 시책에 따른 실적용으로 둔갑했다. 직무를 코칭하는 멘토조차 없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허드렛일만 하다 끝난다. ‘복사 인턴(직무 경험은 못 하고 복사만 실컷 한다)’이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청년대책, 단기 노동력 활용 변질

지난해 일경험 프로그램이 처음 도입되면서 청년이 취업 전 직무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물꼬가 트였다. 하지만 채용 과정으로 변질한 인턴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일경험 프로그램에 참여한 회사는 20개뿐이다. 그나마 대기업은 5개사에 그쳤다. 다행인 것은 이들 회사의 일경험 프로그램이 알차다는 점이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롯데호텔의 ‘Hotel Maker Project’는 호텔 서비스 직무교육을 하고, 배운 내용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호텔 투숙 기회를 제공한다. 현직 멘토가 붙는 것은 물론 호텔 상품 개발을 주제로 팀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현대자동차의 ‘H-experience 프로그램’은 스마트 모빌리티 분야의 경험 축적 기회를 준다. 인재발굴형, 현장체험형, 채용전환형 등 과정도 다양하다. SKT의 ‘AI fellowship’은 대학(원)생이 현업 선배의 밀착 멘토링과 연구비 지원을 받아 5개월간 인공지능(AI) 등 기술 분야 실무 과제를 기획부터 개발까지 완수하는 프로그램이다.

업종별 일경험 프로그램도 싹트고 있다. 대한가구산업협동조합연합회에 신세계까사·자코모·다우닝 등이 참여해 가구제조와 디자인·유통·영업 등 가구산업의 핵심 직무에 대한 일경험을 제공한다. 아시아나, 티웨이 등이 참여한 항공우주산학융합원 프로그램에선 항공정비, 공항서비스 실무를 배울 수 있다.

일경험…‘중고 신입’ 활로 열어

이런 프로그램은 향후 청년의 일경험 정책 개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 주도에서 대학 등 교육기관과 기업이 연계해서 민간 주도의 일경험 체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인증이나 기관 발굴, 운영비용 지원, 모니터링에 집중해야 한다. 직무 경험 제공에 공을 들이는 미국(Apprenticeship), 네덜란드(S-BB), 호주(Youth Jobs PaTH)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정보를 얻지 못하는 청년이 부지기수인 점을 고려해 쉽게 일경험 프로그램에 접근할 수 있는 플랫폼 구축도 시급하다.

범정부 차원의 정책협의회 운영 또한 필요하다. 지금처럼 각 부처가 우후죽순 프로그램을 난립 운영하면 일경험은 뒷전이고, 실적 올리기에 급급할 수 있어서다. 부처 간 정책 조정은 물론 중앙과 지방자치단체, 기업·교육기관·전문가 그룹이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통합 지휘부를 만들어야 효율성을 기할 수 있다.

특히 일경험 프로그램의 다양성과 정교함을 꾀해야 한다. 일주일 이내의 기업탐방, 몇 개월짜리 프로젝트형, 반년 이내의 인턴십(채용형 인턴 제외)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말 그대로 직무 경험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적합한 수행 방식을 다듬고, 지원 방안의 차별화가 필요하다.

학교에서 열심히 배우고도 취업 공포에 시달리는 게 지금 청년이다. 치유할 길은 하나다. ‘중고 신입’이 될 길을 터주는 것, 그게 정부와 기업, 학교가 할 일이자 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