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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은미의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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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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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최은미 소설가

최은미 소설가

어느 해부터인가 10월 주말이 되면 자연스럽게 절에 가게 되었다. 해마다 두어 차례 정도 템플스테이를 하곤 하는데 일정을 잡다 보면 봄도 여름도 아닌 10월로 날이 잡힐 때가 많았다. 혼자일 때도 있고 일행이 있을 때도 있지만 해가 반복되다 보니 매번 같이 가게 되는 팀이 하나 생겼다. 아이와 아이 친구와 나, 이렇게 셋이 고정 멤버가 된 팀이다.

절에서 묵는 날 밤에 먹을 간식을 사는 것으로 그 팀의 템플스테이는 시작된다. 절에선 대개 오후 여섯시가 되기 전에 저녁 공양이 끝나는데 아이들은 매번 그날 밤 잠을 안 잘 결심을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골라 사온 컵라면과 과자를 싣고 조용히 운전을 시작하면서 나는 아이와 아이 친구가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저애들이 왜 벌써 중학생이 되었지 생각하면서.

해마다 10월이면 템플스테이
지난해 그날엔 ‘이태원 참사’
늦도록 끄지 못한 산사의 불빛
‘그날’의 기억은 계속 남을 것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절에 도착해 법복과 이불 커버를 받고 방사 안내를 받다 보면 옆방으로 건넌방으로 속속 도착하는 다른 참가자들이 보인다. 템플스테이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같이 가는 일행 못지않게 그날의 다른 참가자들과 하룻밤을 같은 공간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본 적이 없고 이후에도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 템플스테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특정 구역에서 함께 머무른다는 것. 나는 그것이 언제나 좋다.

그곳엔 적당한 거리감이 주는 편안함과 조건 없는 호의가 있다. 옆방 사람과 말 한마디 안 나눠도 이상할 게 없고 스님과 둘러앉은 시간에 갑자기 누군가의 속 깊은 고민을 듣게 돼도 부담스러울 일이 없다. 같은 공기를 나누고 있다는 데서 오는 공감대는 덤이다. 그래서인지 템플스테이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내게 거리의 축제 현장에 잠깐 몸을 맡기고 올 때처럼 익명 속에 숨은 채로도 타인과의 유대감을 맛볼 수 있는 창구가 되어주곤 한다.

일 년 전인 2022년 10월 29일 토요일에도 나는 아이와 아이 친구와 함께 절에 갔다. 그날 저녁의 몇몇 장면들이 있다. 아이들은 흰 이불 커버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그 위에 안경을 쓰고는 핼러윈 달걀귀신 콘셉트로 사진을 한참 찍는다. 그렇게 놀다가는 혼자 온 듯한 옆방 사람 문 앞에 과자를 한 봉지 놓아둔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는 포스트잇을 붙여서.

저녁 일정이 끝난 뒤에 셋은 방에 나란히 누워 마스크팩을 한다. 아마도 여전히 초저녁일 것이다. 아이들은 생생우동과 너구리를 먹고, 나는 이태원에 나가 있다는 친구가 톡방에 올려준 재미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답 메시지를 남긴다.

그러니까 나는 그날 저녁을 다른 템플스테이 때보다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8년 전의 4월에 그러했듯 참사 당일의 순간순간을 계속 복기하면서 이태원에서 첫 신고가 접수된 18시34분을, 공식적인 사고 발생 시각인 22시15분을, 그 사이의 시간을, 그때 아이와 아이 친구가 어떤 모습이었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계속 떠올려보려 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1년이 흐른 지난 주말에 아이와 아이 친구와 나는 다시 템플스테이를 했다. 10월이니까. 10월이 와서, 컵라면과 과자와 마스크팩을 싣고 우리는 절에 갔다. 아이들도 1년 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얘기를 잠깐 나누었던 것도 같다. 늘 그랬듯 너희들은 어느 순간 잠이 들었지. 옆방 여자분이 문을 열고 과자를 들여가서 참 좋았어. 나는 이태원에 가 있던 친구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했지. 그러고 나서도 휴대폰 속에서 계속 업데이트되는 소식들을 믿을 수 없어서 내내 폰을 놓지 못했다. 다른 방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소등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그날 템플스테이 숙소의 불들은 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날부터 시작된 지난 1년에 대해서는 아이들에게 쉬이 말해줄 수가 없었다. 책임과 애도가 빗겨나간 시간에 대해서, 그날의 모든 순간을 알고 싶다고 말하는 유가족에 대해서, 그날의 규명만이 치료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한 참사 생존자에 대해서, 아침에 인사를 하고 나간 너희가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일에, 그 당연함에 안도를 느껴야 하는 이곳에 대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2023년 10월의 템플스테이에서도 아이와 아이 친구는 밤새 푹 잤다. 자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10월이 다시 오고 이 세상에 템플스테이가 존재하는 한 2022년 10월 29일은 이 팀 안에 계속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 오래도록 소등되지 못하던 옆방과 건넌방의 불빛들처럼. 우리에게 10월의 템플스테이는 그러한 의미가 되었다.

최은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