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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만 안 올라 뭐든 해야" 온라인·AI 활용 'N잡러' 54만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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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1호 10면

‘조용한 부업’ 열풍

지난 18일 오후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 시내를 이동 중인 배달 노동자의 모습. [뉴시스]

지난 18일 오후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 시내를 이동 중인 배달 노동자의 모습. [뉴시스]

“교통비, 점심값 등 안 오른 게 없는데 월급은 그대로니 뭐라도 해야죠.”

서울시 중구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홀로 점심을 먹던 직장인 김경민(38)씨는 자신의 태블릿PC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태블릿 화면에 나타난 건 블로그 방문자수 통계. 점심시간을 활용해 ‘블로그 운영 대행’ 부업에 열중하던 참이다. 김씨는 “건당 사례를 받고 블로그에 올라갈 콘텐트를 대신 작성해주다가 아예 운영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며 “큰돈 버는 일은 아니지만,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조용히 추가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미국도 부업 증가세, 정규직 43%가 투잡

서울의 한 중견기업 재무팀에 근무 중인 직장인 박준수(41)씨의 부업은 작명(作名)이다. 브랜드 네이밍 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서비스나 상품의 이름을 지어주고 대가를 받는 식이다. 박씨는 “아직은 최저시급 수준의 수익이지만,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게 메리트”라고 말했다. 또 다른 직장인 한모(37)씨는 국내에는 없는 상품을 대신 구해주는 ‘해외구매대행’으로 소득을 늘리고 있다. 출퇴근길과 식사시간을 쪼개 상품 검색하고 온라인상점에 등록한 다음 퇴근 후 쌓인 주문을 처리하는 게 일과다. 한씨는 “본업에 열중하는 사이에도 온라인에선 매출이 발생하는 게 이 부업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부업이 열풍이다. 물가상승과 경기 부진이 이어지면서 살람살이가 팍팍해지자 부업을 통한 추가 소득에 눈길이 쏠리는 것이다. 여기에 모바일과 인터넷 플랫폼이 발전하면서 시간과 공간 제약 없이 부업이 가능해진 것도 이런 추세에 한몫하고 있다. 배달대행이나 대리운전 등 기존의 부업과 달리 회사에 알리지 않고도 추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부업, 이른바 ‘조용한 부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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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업을 하고 있다는 근로자 수는 역대 최고치(54만6000명)로 치솟았다. 일이 끊겼거나, 잠시 쉬는 등 지금은 부업을 하지 않더라도 한 번이라도 해본 직장인은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8월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열명 가운데 아홉명(89%)은 본업과 함께 부업을 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추광호 전경련 경제본부장은 “비대면 디지털 경제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플랫폼 노동이 확대돼 부업하기 쉬운 환경이 마련됐다”고 분석했다.

인공지능(AI)의 발전도 부업 하는 직장인들에게 단비로 여겨진다. 본업과 부업을 넘나드는 ‘N잡러’(복수의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시간. 그런 N잡러들에게 인공지능은 단순반복 작업 시간을 줄여주는 도구로 활용된다. 예컨대 간단한 작문이나 그림은 물론 홈페이지 관리·코딩 같은 일에 인공지능을 활용해 대략적인 초안을 만드는 것이다. 온라인 구매대행을 부업으로 삼은 한씨도 “최근에는 AI를 활용한 상품 검색, 번역 프로그램도 많아 적절히 활용하면 귀찮은 일이 줄어든다”며 “모바일 원격 제어 프로그램까지 활용하면, 스마트폰만으로 어디서든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일자리를 통한 부업에 나서는 건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용한 퇴사와 조용한 해고를 거치며, 본업에서 소득을 올리겠다는 기대를 접고 조용한 부업에 나서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디지털 부업으로 소득을 늘렸다는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온라인 그림 판매로 월평균 2만2000달러를 벌고 있다는 도모니크 브라운(29)도 그중 하나다. 그는 CNBC와 인터뷰에서 “2020년까지만 해도 본업 외에 또 다른 정규직 일자리를 병행했으나 지금은 하나만 유지하고 있다”며 “퇴근 후 시간과 주말을 이용해 한주에 10시간 정도 PC로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누구나 고소득을 올리는 건 아니지만, 미국에서도 부업에 나서는 직장인은 증가세다. 사업 자동화 플랫폼 업체인 자피에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34%는 부업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규직 근로자의 경우 이 비율은 43%로 뛰어오른다. 올해 안에 부업을 시작하겠다는 응답자도 24%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업을 하는 근로자 규모는 코로나19 확산 전인 2019년까지만 해도 5%가량으로 추정됐지만 몇 년새 급증한 셈이다.

일본 기업 “승진하려면 부업 경험 필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업을 제재하는 기업들도 늘었다. 세계 2위 전자상거래 플랫폼 쇼피파이의 공동 창업자인 토비아스 뤼트케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3일 직원들에게 “회사에서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부업을 하지말라”고 요구했다. 미국 신용정보기업 에퀴팩스는 지난해 부업 하는 직원 24명을 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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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부업은 금기시되는 경향이 강하다. 일단 공무원이나 공기업에선 사전 허가가 필수적이다. 최근 겸직금지 규정 위반으로 징계 대상에 오른 것으로 알려진 유튜버 김재혁(40)씨가 대표적인 사례다. 과학 유튜버 궤도로 유명한 김씨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기관인 한국과학창의재단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겸직금지 규정을 어기고 유튜버 활동을 한 탓에 징계 대상에 올랐다. 국가공무원 복무규정 25조에선 공무원의 영리업무를 금지하고 있다. 김씨는 지난해 8월 사직 의사를 밝힌 상황이다.

민간 기업도 마찬가지다. 블로그 운영이나 작명 부업에 나선 김씨와 박씨처럼 회사에서 허락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 기업은 근로계약서나 취업규칙, 별도 약정서 등을 통해 겸직을 제한하는 게 일반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근로계약서에 경쟁 금지 조항이나 품위 유지 조항이 붙어 있어 현실적으로 가능한 건 부동산 임대업 정도”라며 “직원이 창작한 글이나 그림, 영상 등 콘텐트가 구설에 오르면 회사 이미지에도 타격이 불가피해 웬만한 건 금지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부업을 경계하는 한국이나 미국과 달리 일본에선 부업을 장려하는 상황이다. 저출산·고령화로 노동 인구 부족에 직면한 일본 정부는 2018년 부업·겸업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이어 2019년엔 기업 취업 규칙 기본 지침에서 부업·겸업 금지 항목을 삭제했고, 2022년엔 기업들에 부업·겸업 허용 관련 정보를 공개하도록 했다. 그러자 부업을 허용하는 민간 기업의 수는 급증했다.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에 따르면, 부업 허용 기업 비율은 2018년 30%에서 지난해 53%로 늘었다.

직원들의 부업을 장려하는 기업도 부지기수다. 미쓰이스미토모해상보험에선 과장으로 승진하려면 부업이나 자회사 파견 등 다른 일을 해본 경험이 필수적이다. 2020년부터 부업을 허용한 일본 생활용품 제조기업 라이온의 코이케 요코 인사담당 임원은 “사회가 변하는데 대기업 직원들은 같은 가치관으로 일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며 “부업을 허가해 생기는 위험보다 외부 변화를 모르는 데서 오는 위험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본업·부업 경계 모호, 사회보험·조세 등 제도 변화 논의해야

590만원. 부업을 하는 직장인 N잡러들 사이에서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는 월 소득이다. 국민연금 기준소득월액 상한선인 이 금액을 넘어서면 국민연금공단에선 소득 비율 대로 국민연금을 나눠 납부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전달받은 회사 측에선 직원의 부업 여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조용한 부업’을 회사에 알리지 않으려면 본업에서 받는 급여와 부업 소득을 더한 금액이 590만원을 넘어선 안 된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직장인 N잡러들 사이에 특정 금액이 공유될 정도로 부업 여부를 알리길 꺼리는 이유는 뭘까. 일단 법적으론 부업을 한다는 것 만으론 문제가 될 게 없다. 우리 헌법 15조에선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고용노동부에서도 부업을 사생활의 영역으로 해석하는 덕분이다. 그러나 개별 기업들은 상당수는 여전히 근로계약서와 취업 규칙 등을 통해 겸업을 금지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부업과 관련한 소송이 종종 벌어진다.

부업이 문제가 돼 법원까지 간 경우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다. 법원 판례에선 본업에 지장이 없는 한 부업을 인정하지만, 지장이 있다면 징계 사유로 인정하는 것이다. 회사 업무를 통해 습득한 정보를 활용하는 것 역시 합당한 징계 사유라는 게 중론이다. 합법적인 부업으로 인정받으려면 본업과 부업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디지털 플랫폼의 발전으로 본업과 부업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점이다. 회사 입장에선 스마트폰을 자주 만지작거리는 직원을 모두 확인하기도 어려운 데다, 간접적으로라도 회사 생활 중에 얻은 정보와 경험을 부업에 활용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직장인 한모(37)씨는 “스마트폰이나 PC 사용 기록을 통해 겸업 금지 조항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더라도 사생활이 완전히 노출되는 위험을 부담해야 한다”며 “징계를 피하더라도 ‘한눈파는 직원’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도 부담”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용형태가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제도도 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평생 직장 개념이 옅어지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본업·부업 구분에 묶이기보단 노동시간과 사회보험 적용 기준, 산업재해 책임, 조세 제도 개편 등 다양한 제도 변화를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문정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연구위원은 “유사한 경제활동에 대하여 자격 유형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담해야 하는 사회보험료에 차이가 난다면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며 “노동시장 변화를 포용하기 위해 제도가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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