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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하나에 두 개 정상석, 사라진 비석…학가산 미스터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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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1호 15면

학가산(882m)의 정상 국사봉 . 이 국사봉은 경북 안동에 걸쳐 있지만, 예천 쪽에는 또 다른 국사봉을 정상으로 표시하는 비석이 있다. 학가산은 안동에서는 배산(背山), 즉 진산(鎭山)이고, 영주에서는 앞산, 즉 안산(案山)이며, 예천에서는 해 뜨는 산, 즉 동산(東山)으로 부르기도 한다. 김홍준 기자

학가산(882m)의 정상 국사봉 . 이 국사봉은 경북 안동에 걸쳐 있지만, 예천 쪽에는 또 다른 국사봉을 정상으로 표시하는 비석이 있다. 학가산은 안동에서는 배산(背山), 즉 진산(鎭山)이고, 영주에서는 앞산, 즉 안산(案山)이며, 예천에서는 해 뜨는 산, 즉 동산(東山)으로 부르기도 한다. 김홍준 기자

그 산성은 신라가 만들었을까, 고구려가 만들었을까. 그 산 정상의 비석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흔적을 찾으러 갑니다.” 박홍국 위덕대 연구교수, 장두강 전 길주초등학교 교장과 함께 경북 학가산(鶴駕山·882m)으로 향했다.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문수지맥이 남쪽으로 내달리다 경북 너른 평야에 마지막으로 불끈 치솟았는데, 그게 학가산이다.

학가산 연구에 30년을 바친 장 선생의 『학가산』을 보자. 이 산이 걸친, 혹은 보이는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안동에서는 뒤를 든든히 받치는 배산(背山), 즉 진산(鎭山)으로 부른다. 예천에서는 해 뜨는 산, 즉 동산(東山)이고, 영주에서는 앞산, 즉 안산(案山)이다. 무엇보다 ‘가을산’이다. 이 산의 소나무 때문이다. 안동은 소나무 점유율이 전국 평균의 두 배가 넘는 49%다. 물들어 붉어지고 노래진 나무와 풀은 소나무의 초록을 병풍 삼아 더욱 빛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을산'이라고 부른다.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의 김삿갓소나무. 수령 400년이 넘었다. 928도로를 타고 가다 만날 수 있다. 김홍준 기자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의 김삿갓소나무. 수령 400년이 넘었다. 928도로를 타고 가다 만날 수 있다. 김홍준 기자

학가산 남쪽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의 광흥사에는 수령 500년 된 은행나무가 방문객을 맞이해주고 있다. 김홍준 기자

학가산 남쪽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의 광흥사에는 수령 500년 된 은행나무가 방문객을 맞이해주고 있다. 김홍준 기자

400년 된 소나무가 있다. ‘김삿갓’ 김병연(1807~1863)이 소나무 아래를 쉼터 삼아 털썩 앉았단다. 그래서 이름 붙은 ‘김삿갓 소나무’가  928번 지방도 아래에 우듬지를 살짝 보여주고 있다. 4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이 창건했다는 광흥사(廣興寺) 일주문 뒤 16m 높이로 서 있다. 400년 된 소나무와 은행나무는 모두 학가산 자락에 있다.

안동 서후면 재품리와 예천 보문면 산성리를 가르는 고개 당재를 들머리 삼았다. 학가산은 아래에서 위로, 가슴까지는 후덕한 육산(肉山·나무와 흙이 많은 산)이지만 그 위로는 장대한 골산(骨山·바위가 많은 산)이다. 과연 오르면 오를수록 바위들은 어깨를 넓히더니 떡하니 큰 바위 봉우리가 나타났다.

“어? 방금 정상석을 지나왔는데….” 기자가 물어보자 장 선생은 “예천 쪽에 하나, 안동 쪽에 하나가 있다”고 답했다. ‘하나의 산, 두 개의 정상석’이다. 게다가 두 정상석 모두 국사봉이라고 새겨 놨다.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산(봉우리) 이름은 국사봉이다. 138개나 있다. 이곳 학가산에 있는 두 곳 모두를 셌는지는 불분명하다. 여하튼, 정상석에는 지역 자존심이 엿보인다.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에 있는 학가산(鶴駕山·882m) 정상석. 정상석은 예천군 보문면에도 있는데, 두 정상석 모두 '국사봉'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에 있는 학가산(鶴駕山·882m) 정상석. 정상석은 예천군 보문면에도 있는데, 두 정상석 모두 '국사봉'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에 있는 학가산(鶴駕山·882m) 정상석. 정상석은 안동시 북후면에도 있는데, 두 정상석 모두 '국사봉'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에 있는 학가산(鶴駕山·882m) 정상석. 정상석은 안동시 북후면에도 있는데, 두 정상석 모두 '국사봉'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자, 작업 들어갑시다.” 박 교수와 장 선생이 국사봉 위 물결치듯 홈을 이룬 바위에서 풀을 제거했다. 박 교수가 “여기를 보세요”라며 손으로 가리켰다. 움푹 쪼아낸 흔적이었다. 너비 103㎝, 폭 18.5㎝였다. 박 교수는 “옛 기록들에 의하면 큰 비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곳이 아닌가 싶다”고 전했다.

『영가지(永嘉誌)』에는 학가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안동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산정에는 두 성터가 있으며, 동성(東城) 안에 국왕이 살았다고 한다…. 국사봉이란 높은 봉우리가 있고, 그 위에는 오랜 세월 바람에 닳은 수척짜리 비석이 있다.’ 『영가지』는 1608년 편찬된 안동 읍지다. 조선 후기 김진귀(1779~1855)는 학가산 국사봉에 올라 ‘비석이 깨지고 이지러져 분간하기 어려우나 ‘태창 진흥왕(太昌 眞興王)’이란 몇 글자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은 신라 때의 고적’이라고 썼다.

학가산(鶴駕山·882m) 정상 국사봉에서 장두강(왼쪽) 전 길주초등학교 교장과 박홍국 위덕대 연구교수가 삼국시대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의 하단을 조사하고 있다. '수레를 타고 날아가는 학과 같다”하여 이름 붙은 학가산은 경북 안동과 예천에 걸쳐 있다. 김홍준 기자

학가산(鶴駕山·882m) 정상 국사봉에서 장두강(왼쪽) 전 길주초등학교 교장과 박홍국 위덕대 연구교수가 삼국시대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의 하단을 조사하고 있다. '수레를 타고 날아가는 학과 같다”하여 이름 붙은 학가산은 경북 안동과 예천에 걸쳐 있다. 김홍준 기자

박 교수는 이를 근거로 이곳에 제5의 진흥왕 순수비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박 교수는 2013년 3월에 장 선생과 함께 국사봉에 올라 비석 최하단부를 발견했다. 판독 불능의 명문도 찾았다. 비석에 글을 새기기 전 몸풀이 흔적인 ‘연습각자(練習刻字)’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에도 연습 각자가 새겨져 있다. 신라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 하단부(비좌에 꽂히는 촉)는 안동시립박물관이 보관 중이다.

“성터가 보이죠? 이쪽은 급경사이고 저쪽은 바위가 막아주니 성을 쌓을 필요가 없었겠죠.” 장 선생의 말이다. 위 기록에서 언급한 ‘두 성터’는 동학가산성과 서학가산성이다. 장 선생은 “고구려의 산성 축조법이 보인다”며 “삼국시대에, 안동 지역의 여느 산성과 달리 남쪽 방비를 위해 축조된 것으로 보이지만 일부 구간은 북쪽 방어를 위한 성벽도 있다”고 밝혔다.

학가산(882m)의 동학가산성. 서학가산성과 함께 학가산을 방어했는데, 자연바위와 절벽을 이용한 이 두 산성은 길이가 3.5km에 이른다. 언제, 누가 지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왔다고 한다. 김홍준 기자

학가산(882m)의 동학가산성. 서학가산성과 함께 학가산을 방어했는데, 자연바위와 절벽을 이용한 이 두 산성은 길이가 3.5km에 이른다. 언제, 누가 지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왔다고 한다. 김홍준 기자

삼국사기 잡지 편에는 고구려의 주·군·현·성 중 현재의 안동을 굴화현(屈火縣)이라고 적고 있다. ‘하슬라주(何瑟羅州)’의 일부분이었다. 하슬라는 한반도 고대 연구에서 논란이 되는 지명이다.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중반까지 남하하는 고구려와 북진하는 신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는데, ‘하슬라’라는 곳은 국경선의 변경, 양국의 실질적 지배에 따라 옮겨 다녔다(박노석 ‘삼국시대 실직과 하슬라의 위치 이동’).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역주 삼국사기』에는 하슬라주를 이루는 지역에 대해 강원 고성부터 경북 포항까지 열거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하슬라는 강릉, 실직은 삼척 일대로 알려져 있다. 안동을 포함한 동해 쪽은 신라가 5세기까지 고구려와 ‘밀당’을 하다가 6세기 초에 안정적으로 장악했다. 장 선생은 “학가산성의 남향 성벽은 고구려가, 북쪽 방비 지점은 신라가 만든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의 학서정(鶴棲亭) 뒤로 학가산(鶴駕山·882m) 상사바위가 보인다. 표교차 100m에 달하는 상사바위에는 암벽등반 루트 5곳이 개척돼 있다. 김홍준 기자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의 학서정(鶴棲亭) 뒤로 학가산(鶴駕山·882m) 상사바위가 보인다. 표교차 100m에 달하는 상사바위에는 암벽등반 루트 5곳이 개척돼 있다. 김홍준 기자

조선 시대까지 있었던 큰 비석(혹은 여러 비석)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박 교수와 장 선생은 “국사봉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며 "고대사 연구 자료들이 어딘가에 묻혀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국사봉에서 안동·예천·영주가 훤히 보인다. 고구려와 신라가 이 요충지를 얌전히 놔뒀*을 리 없다. 통신사와 방송국 기지도 이 학가산을 그대로 놔두지 못하고 있다. 유선대 소나무 밑에서 보는 국사봉이 제대로 익은 가을이다. 재품리 천주마을로 내려섰다. 남자는 영근 사과를 따고, 여자는 토실한 고구마를 캐고 있었다. 할머니가 기자에게 뮬어봤다. “물 잡쉈어?”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다. 미스터리 투성이 학가산으로 가을이 깊이 내려서고 있었다.

학가산(鶴駕山·882m) 정상 국사봉 하단의 능인굴能仁窟). .의상대사의 10제자 중 한 명인 능인대사가 수행을 했다는 기거처로 사시사철 약수가 흐른다. 김홍준 기자

학가산(鶴駕山·882m) 정상 국사봉 하단의 능인굴能仁窟). .의상대사의 10제자 중 한 명인 능인대사가 수행을 했다는 기거처로 사시사철 약수가 흐른다. 김홍준 기자

* 덧붙이는 말 1 : 할머니가 "물 잡쉈어?"라고 말하자 잠시 어리둥절했는데, 곧 국사봉 밑 능인굴(能仁窟)의 약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아, 능인굴 약수요?"라고 기자가 답하자 할머니는 "그치, 그거"라고 되받았다. 능인굴은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대사가 기거했다는 굴이다. 

* 덧붙이는 말 2 : 학가산에 가기 위해서는 대중교통보다 자차 이용이 편하다. 천주마을에는 버스가

하루 네 번만 간다. 천주마을-마당바위-기지국-유선대-국사봉-또 다른 국사봉-상사바위-당재-천주마을. 3시간 20분 정도면 족하다.

학가산 지도

학가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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