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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엔 발등의 불, 중국엔 기회 선사한 중동 전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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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로 출국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EPA=연합뉴스

이스라엘로 출국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EPA=연합뉴스

1938년 9월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무력 팽창을 거듭하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저지하기 위해 독일 뮌헨으로 날아갔다. 유럽 열강 정상들이 모여 회의한 끝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독일이 차지하는 대신 독일은 더는 외국을 침략하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듬해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체임벌린은 물러났고 강경파 윈스턴 처칠이 권력을 잡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8일 이스라엘로 날아갔다. 벤야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비롯,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이집트, 요르단 정상을 잇따라 만나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 종식을 중재하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지상군을 투입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며 이란까지 나서 미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하지만 17일 민간인 수백 명이 사망한 가자지구 병원 폭발 사건이 터지면서 네타냐후 외 정상들과의 만남은 취소됐다. 바이든의 중재가 최종 실패한다면 강경파 도널드 트럼프가 권력을 탈환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번 중재가 옛 뮌헨 협정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다. 차이라면 지금의 전쟁은 강대국 간 직접 대결이 아니라 미국·유럽연합 대 중국·러시아와 이란 등 아랍 세력의 대리전 양상이란 점이다. 여하튼 세계대전급 전운이 짙어지고 있다.

한편 중국 베이징에선 국제적 축제가 열렸다. 2017·2019년에 이어 세 번째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이 17·18일 개최됐다. 140개국 4000여 명의 각국 대표단이 참가했다. 봉건시대 때 각국에서 천자에게 조공을 바치던 만방래조(萬邦來朝)를 연상케 했다. 하이라이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문과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이었다. 푸틴은 중국 CCTV와 가진 인터뷰에서 “시 주석은 일시적인 흐름에 따라 결정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고 장기적인 결정을 할 줄 안다”며 “이것이 진정한 세계 지도자와 ‘임시직’이라 부르는 이들과의 간극”이라고 치켜세웠다.

17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을 만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오른쪽은 시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여사. 시 주석은 18일 푸틴 대통령과 회담을 갖는다. 중·러 회담에서 우크라이나 사태와 중동 사태 해법 등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연합뉴스]

17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을 만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오른쪽은 시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여사. 시 주석은 18일 푸틴 대통령과 회담을 갖는다. 중·러 회담에서 우크라이나 사태와 중동 사태 해법 등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연합뉴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과 축제 중인 중국은 현 정세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중국과 러시아 같은 미국의 지정학적 경쟁국들에 호재라고 평했다.

우선 러시아의 입장이다. 하마스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민간인 학살로 비난받는 러시아에 좋은 반격 거리다. 16일까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보복 공습으로 사망한 민간인은 2750명에 달했다. 전쟁이 이란 등 주변 국가들의 개입으로 확대되면 우크라이나에 집중된 미국의 군사 지원이 이스라엘로 분산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이득을 볼 것이라는 건 불문가지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서방이 석유와 가스 수출을 제재해온 이후 대체 공급지 역할을 하던 중동이 전쟁에 휩싸인다면 러시아에 대한 제재도 약해질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어떤가. 미국 세계 대전략의 핵심 중 하나는 복수의 지역에서 미국이 군사적으로 대처해야 할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모든 지역에서 미국의 이익 실현을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만을 놓고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중국 입장에서 미국의 관심이 다시 중동으로 쏠리는 것은 반길 일이다. ‘중동으로의 중심축 재이동(re-pivot to Middle East)’이라 할 만하다. 중동 정세 불안의 심화가 미국 경제 패권이 약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푸틴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를 2차대전 때 나치 독일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봉쇄와 비교하며 이스라엘과 나치를 동일시했다. 푸틴이 서방의 신식민주의에 맞서는 국제 운동의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려 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가브리엘리우스 란트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은 WSJ에 “러시아인들은 이스라엘 분쟁이 가능한 한 오래가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다”며 “그들에겐 우크라이나(전쟁)에서 전술·전략적으로, 또 서방세계에 맞서 자신들의 서사를 강화하는 승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중국인 4명이 죽고, 3명 이상 납치됐다. 하지만 중국은 수십 년간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팔레스타인 편에 섰다. 우선 하마스의 공격에 대해 ‘테러’라는 표현을 자제하고 있다. 외교부장을 겸하고 있는 왕이(王毅)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은 “팔레스타인 문제는 중동 문제의 핵심”이라며 “문제의 핵심은 팔레스타인 인민에게 정의를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톤 본다즈 프랑스 전략연구재단 연구원은 “중국은 미국을 불안 요인으로, 중국을 평화 요인으로 그리려 한다. 중국의 목표는 개발도상국들에 보다 매력적인 대안이 되는 것”이라고 봤다.

지난 6월 14일 중국을 방문한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대통령(오른쪽)이 시진핑(왼쪽) 중국 국가주석과 인민대회당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지난 6월 14일 중국을 방문한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대통령(오른쪽)이 시진핑(왼쪽) 중국 국가주석과 인민대회당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그간 중국은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해외 정상 중 올해 최초로 방중하는 등 팔레스타인의 자치권 보장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과도 무역과 투자 등 다방면에서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그간의 기조와 달리 이번에 사실상 하마스 일변도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선, 중동에서 이스라엘은 우호세력이 없지만,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아랍 연맹은 20개국이 넘는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 일대일로 정상포럼엔 G7 등 주요 서방국들이 대거 불참했다. 반면 주최하는 중국은 소위 글로벌사우스(저위도나 남반구에 있는 개발도상국) 국가들을 위해 동시통역 등 편의 서비스를 강화하며 공을 들였다. 서방 자유주의 세력을 배제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가 개도국들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지 못했다고 각인시키는 모양새다.

세계 곳곳에서, 갖가지 이슈를 통해 서방과 중·러 간의 간극은 벌어지고 있다. 미·중 경쟁이 더는 심화하지 않고 점차 소통과 협력에 무게중심을 둘 것이란 낙관적 전망도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봐선 이런 전망에 선뜻 동의하기 망설여진다. 두 세력을 중재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거의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하마스에 책임을 묻지 않는 러시아의 휴전 결의안은 결국 부결됐다. 유엔이 힘을 상실하는 모습은 2차대전 전 추축국인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가 외국 침략에 대한 국제연맹의 권고와 제재를 무시하고 연맹을 탈퇴한 일을 떠올리게 한다. 결과는 세계대전이었다. 미국이 유능함을 발휘해 중동의 평화를 중재할 수 있을지, 미국의 대안세력이 되려 하는 중국의 기획은 얼마나 성공할지가 미래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가 될 것이다.

차이나랩 이충형 특임기자(중국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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