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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의 '특수상해' 무죄 판단, 판사도 따랐다…'그림자배심' 해보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7일 오전 11시 서울남부지법 406호 법정. 법복을 입은 검사 옆으로 8명의 남녀가 자리했다. 반대편에 앉은 피고인보다 더 긴장된 표정의 이들은 특수상해·모욕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박모(38)씨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이다. 기자도 ‘그림자 배심원’으로 방청석에 앉았다.

그림자 배심은 법원에서 운영하는 배심제 체험 프로그램이다. 실제 배심원단과 동일하게 국민참여재판의 모든 과정을 참관하고, 평의·평결을 거쳐 유·무죄와 양형 판단을 내린다. 신청자 중 무작위로 선정된 7명으로 구성되지만, 이날은 언론 공개를 위해 12명의 그림자 배심원이 재판을 참관했다.

박씨는 지난해 9월 자신이 사는 서울 영등포구 한 아파트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던 중 이를 제지하던 이웃 주민인 피해자 공모(56)씨를 오토바이로 치고 욕설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국민참여재판 자료 사진. 중앙DB

국민참여재판 자료 사진. 중앙DB

재판은 정도성 부장판사가 배심원들에게 10분 가까이 재판 절차와 주의사항을 일러주는 것으로 시작됐다. 법률가들만 참여하는 일반 재판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미리 제공된 설명 자료에는 ▶오토바이를 이용해 피해자 무릎을 치고 발등을 밟고 지나갔는지 여부 ▶고의성 여부 ▶폭언을 했는지, 또 박씨 발언이 모욕에 해당하는지 여부 등 재판의 쟁점이 정리돼 있었다. 증거목록과 적용 법조에 관한 설명도 제시됐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박씨가 혐의를 전부 부인하고, 당시 폐쇄회로(CC)TV 영상에서도 실제 오토바이로 피해자를 쳤는지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아 배심원을 설득하기 위한 양측 공방이 벌어졌다.

우선 검사와 변호인은 구체적인 주장을 펼치기에 앞서 일반 국민들이 어려워할 만한 법률 용어의 의미를 설명했다. 검사는 프레젠테이션을 동원해 “법률상 ‘고의’라는 건 속마음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확정적 고의는 ‘난 칠 거야!’하고 치는 것이고, 미필적 고의는 ‘피해자가 치일 수도 있을 거 같은 데 다쳐도 어쩔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변호인도 “모욕죄가 성립하려면 여러 사람 앞에서 특정한 사람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표현이 있어야 하는데, 피고인은 욕설하지 않았다”면서 모욕죄 구성 요건을 쉬운 표현으로 설명하며 주장을 펼쳤다.

피해자 진술과 피고인 신문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기자도 그림자 배심원으로서 피고인 박씨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신문 과정에서 잠깐 웃음을 터뜨리거나, 진술이 번복됐다며 자신을 몰아붙이는 검사를 쳐다보는 박씨의 날카로운 표정까지 눈에 들어왔다. 검찰의 구형과 박씨 최후진술까지 듣고 나니 법정 밖은 어느새 깜깜해져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절차가 남았다. 박씨의 유·무죄를 판단하는 평결이다.

법정 밖 별도 장소에 모인 기자를 포함한 그림자 배심원 12명은 박씨의 특수상해 여부에 대해 일차적으로 유죄 1표, 일부 유죄 6표, 무죄 5표라는 의견을 냈다. 모욕 혐의에 대해선 절반으로 갈렸다. 의견 일치를 위한 토의가 시작됐다. 한 그림자 배심원은 “영상에서 브레이크를 잡는 것을 볼 때 미필적 고의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특수상해 혐의가 무죄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그림자 배심원은 모욕 혐의에 대해 “수치심을 줄 수 있는 언행을 한 것을 제3자가 들었다는 점에서 유죄라고 판단된다”고 다른 배심원들을 설득했다. 이런 토의 끝에 그림자 배심원 11명(1명 예비 배심원으로 선정)은 특수상해에 대해선 무죄(유죄 3명·일부 유죄 1명·무죄 7명), 모욕은 유죄(무죄 5명·유죄 6명)라고 보고 벌금 100만원의 형을 정했다.

실제 배심원들도 1시간 가까이 이어진 치열한 평의 끝에 같은 유·무죄 결론에 도달했다. 다만 평의가 만장일치의 형태를 띈 점과 형량을 벌금 150만원으로 정한 점이 그림자 배심과의 차이였다. 재판부도 이 판단을 받아들여 동일한 판결을 내렸다.

도입 15년, 위기의 참여재판…“주먹구구 제도 손 봐야” 

2008년 1월 영·미식 배심제를 변형해 도입한 국민참여재판은 “재판의 투명성 강화 및 실질적 법정중심 재판 활성화의 계기가 됨은 물론 사법부와 국민의 생생한 소통의 장으로 기능하면서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2018년, 사법발전위원회)는 법원의 자평에도 불구하고 최근 위기에 처해 있다.

도입 첫해 64건에서 2013년 345건까지 늘었던 국민참여재판 건수는 2014년 271건으로 줄었고 2016년 잠시 305건으로 반등한 것을 제외하면 지속적 감소세다. 2021년 84건, 2022년 92건에 그쳤다. 2019~2022년에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다중 밀집이 불가피한 국민참여재판 열기 어려웠다는 게 법원의 설명이지만 최근에도 좀처럼 활성화의 계기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던 피고인이 재판 진행 전에 이를 철회하는 비율도 최저인 2014년(38.1%) 대비 지난해엔 59%까지 높아졌다. 국민참여재판 신청 피고인 10명 중 5.9명이 철회 의사를 포기한다는 의미다.

시행 15년이 지났지만 아직 시민들은 배심원 참여를  공동체 구성원의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부담으로 느끼고 있고, 변호사들은 궁여지책 정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날 배심원으로 참여한 직장인 정모(43)씨는 “하루 공가를 내고 왔다. 종일 집중해 재판을 봐야 하니 힘들더라”며 “피해자의 피해도 고려해야 하고, 재판부가 평결 결과를 참고하는 것을 생각하면 누군가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어 굉장히 부담이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배심원 후보자의 출석률은 27.7%에 그쳤다.

국민참여재판을 경험한 변호사는 “법리적으로는 유죄가 나올 것 같아도 피고인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을 때, 또는 국민 법감정이나 여론에 기대 무죄 가능성이 보인다면 국민참여재판이 희망이라는 게 변호사 업계 통념”이라며 “법리 싸움 보다는 감정에 호소해야 할 때 이용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 반쪽짜리 배심제가 제때 개선·확대되지 못한 것이 위기의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배심제도연구회 초대 회장인 박승옥 변호사는 “미국에서는 ‘배심원 지시(Jury instruction)’라는 절차를 통해 각 죄마다 유죄가 성립하기 위한 세부 구성요건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설명을 제시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재판부에 따라 제공되는 정보가 천차만별인 주먹구구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합리적인 평결을 위해서는 충실한 배심원 기피 절차가 보장돼야 하고, 변호인이 관여할 수 없는 배심원 평의 과정에서 판사가 어떤 내용을 배심원들에게 전달했는지도 투명하게 공개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국회에는 현재 합의부 사건에만 적용되는 국민참여재판의 적용범위를 단독 판사가 맡는 사건까지 확대하자거나(조수진 국민의힘 의원) 현재는 피고인이 원할 경우에만 열 수 있지만 재판부가 직권으로 회부하는 것을 허용하자는 등의 법안(20대 국회,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됐었지만 심도있는 입법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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