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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탈북민은 대한민국 국민 아닌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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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 원장·전 북한인권총연합 상임대표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 원장·전 북한인권총연합 상임대표

탈북을 결심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필자도 쥐약 네 봉지를 샀다. 도중에 붙잡히면 무조건 자진(自盡)하려고 했다. 동생들에게도 한 봉지씩 나눠주며 급박한 상황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라고 했다. 북한 주민에게 탈북은 이처럼 목숨을 거는 일이다. 탈북하다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간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북한은 2020년 1월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되자 일방적인 국경 봉쇄조치로 탈북민의 북송을 중단했다. 그해 2월에는 북한의 파견근로자와 불법체류자의 송환 업무를 잠정 중단한다는 공문을 중국에 보냈다. 하지만 북한 보위부와 중국 공안은 불법체류 탈북민에 대한 공조 수사를 계속해왔다.

그 무렵 중국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전국적 방역 감시망을 설치·가동하고 얼굴 인식 프로그램까지 도입했다. 주민등록 및 이동 통제를 대대적으로 강화했다. 중국에서 주민등록이 없는 탈북민이 색출되고 체포됐다.

중국의 탈북민 북송은 인권유린
문 정부 방관, 윤 정부 속수무책
이제라도 재발 방지책 제시해야

[일러스트=김지윤]

[일러스트=김지윤]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입국한 탈북 여성 다수는 인신매매로 한족이 사는 농촌이나 유흥업소로 팔려갔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중국의 많은 유흥업소가 영업정지 되면서 탈북 여성들은 이마저 일자리를 잃었고 신분이 노출돼 대거 체포·구금됐다.

탈북민이 운영하는 인터넷 매체 ‘프리덤 조선’에 따르면 중국 공안은 2020년부터 체포·구금한 북한 여성을 중국 노동교화소 수감자노역장에 집단 배치했다. 극히 적은 인건비만 지급하고 강제노역으로 노동 착취했다.

지난 7월 북한의 코로나19 봉쇄 완화정책으로 북·중 국경에서 인적 왕래가 가능해졌다. 중국 공안당국은 여러 교화소의 강제 노역장에 배치했던 탈북민을 단둥·옌지·투먼 등지에 설치된 임시 구금시설로 집결시켰다. 지난 3년간 불법체류 탈북민을 체포·수사하는 데 들어간 비용과 의료비·식비·숙박비 등을 북한 당국에 청구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자 탈북민은 곧바로 송환되지 않았다.

북한 보위부가 지난 7월 송환 절차를 진행하자고 중국 공안에 통보했지만, 중국 측은 송환 비용을 지불하기 전에는 안 된다고 통보했다. 중국 공안은 탈북민의 강제노역에 따른 노동 착취로 이득을 봤고, 이번엔 탈북민 관리 비용을 받아 이득을 또 챙겼다. 지난 8월 말 탈북민 250~300명이 1차로 북송됐고,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나자 600여 명을 추가 북송했다.

북한 정권은 강제 북송된 탈북민을 제3 의료원(간염 및 결핵 격리병원)에 수용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8월 1차 송환 탈북민은 함경북도 무산군과 온성군에 준비된 격리시설에 옮겨진 뒤 보위부로 넘겨졌다. 최근 북송된 600여명도 격리시설로 이송됐을 것이다.

북한의 반인륜적 고문과 처형 등 인권 탄압은 널리 알려져 있다. 탈북민의 강제 북송이 얼마나 참혹한 인권유린을 초래할지 뻔하다. 그런데도 난민협약을 위반해 탈북민을 강제 북송한 중국 정부의 반인권적 행태를 개탄한다. 이러고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경기 등 각종 국제 행사를 유치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김정은 정권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해 탈북자 송환에 소극적이었던 문재인 정부의 책임도 작지 않다고 본다. 특히 지난 2019년 11월 문 정부는 배를 타고 한국으로 내려온 탈북 청년 어민 두 명을 흉악범으로 낙인 찍어 비밀리에 강제 북송해 공분을 샀다. 1945년 전에 벌어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현재 진행형인 탈북 여성들의 인신매매와 성범죄 피해에는 침묵한다. 탈북민을 배신자 취급하며 인권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인권에 대한 이중 잣대가 아닌가.

이번 탈북민 600명의 강제 북송 와중에 윤석열 정부가 보여준 모습도 실망스럽다. 중국의 북송 움직임이 감지됐고, 북송을 막아달라는 탈북민의 호소가 있었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정부는 중국의 행위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고 재발 방지를 촉구해야 한다.

탈북민은 최상위법인 헌법에서 명시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탈북민의 강제 북송을 막지 못한 것은 국민의 생명 보호를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정부의 직무유기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분명한 대책을 제시하기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 원장·전 북한인권총연합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