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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렬의 세계경제전망

반 전기차 포퓰리즘·중국 포비아에 전기차 ‘급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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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국제정치에 휘둘리는 전기차 시장

이상렬 논설위원

이상렬 논설위원

전기차 시장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영국은 당초 2030년으로 설정한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금지 시기를 2035년으로 5년 연기하기로 했다. 그 이후에도 휘발유·경유를 쓰는 중고차 거래가 허용된다.

유럽연합(EU)은 이달 초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조사를 정식으로 착수했다. 중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은 중국산 전기차가 낮은 가격을 앞세워 시장을 잠식함에 따라 유럽 전기차 산업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전미자동차노조(UAW) 가 미국 3대 자동차 회사(포드·제너럴모터스·스텔란티스)를 상대로 한 달째 파업 중이다. 조합원 수 14만6000명의 UAW가 자동차 3사를 상대로 동시에 벌이고 있는 ‘끝장 파업’이다. 파업의 여파는 자동차 3사의 전기차 사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파업 장기화와 임금 인상 등에 따라 전기차 투자 역량이 위축되기 때문이다.

가격 비싸고 일자리 감소 우려
전기차 전환에 대한 반감 커져

중국산 전기차, 시장 잠식 가속
유럽 전기차 업체 위기감 높아

내년 미국 대선의 핵심 이슈로
한국 자동차 산업에도 악영향

EU는 중국산 조사, 미국 노조는 파업

영국·EU·미국의 최근 움직임은 모두 전기차 시장 확대에 악재다. 올 상반기만 해도 시장 분위기는 좋았다. EU는 회원국들의 찬반 논란 속에서도 203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를 퇴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에선 바이든 행정부가 2032년까지 신차 판매의 3분의 2를 전기차로 대체하는 규제안을 공개했다. 2022년 기준 미국과 유럽에서 신차 판매 중 전기차 비중은 각각 약 24%와 6% 수준에 불과하다. 거대한 전기차 시장이 도래한다는 예고였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그 뒤로 큰 그림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전기차 확대에 급제동이 걸린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유럽과 미국에서 불고 있는 전기차 역풍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전기차의 정치화’다. 전기차가 주요 정치 이슈가 됐다는 점이다.

영국 내연기관 퇴출 연기는 정치적 계산

전기차는 비싸다. 내연기관 차량을 퇴출하고 전기차만 팔면 일반 서민은 자동차를 구입하기 어렵다. ‘부자 프레임’을 씌우기 좋다. 게다가 국민 세금으로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사실은 중산층과 서민을 분노케 한다.

정치인들은 반(反) 전기차 노선이 득표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영국 리시 수낵 총리의 내연기관 차량 퇴출 연기 결정도 정치적 맥락에서 나왔다는 것이 외신들의 분석이다. 미국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수낵 총리의 결정은 노동당에 두 자릿수 이상 뒤진 지지율 격차를 좁히기 위한 도박 속에 나온 정치적 계산”이라고 지적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전기차가 정치 이슈로 부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전기차 전환이 일자리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전기차 생산에는 내연기관만큼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다. 부품이 적고 자동화도 간편하다. 자동차산업은 EU에서 약 13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EU 경제의 약 7%를 담당하는 중추 산업이다. EU 내부에선 전기차 전환이 기존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상당하다.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교통부 장관은 2035년 내연기관 금지를 ‘일자리 파괴 광기’라고 표현할 정도다.

‘현재 일자리’ 대 ‘미래 일자리’

미국 UAW 파업의 표면상의 최대 쟁점은 임금 인상이다. UAW는 4년간 40% 인상을 요구하고 있고, 자동차 3사는 20%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 둘 사이의 격차가 크다. 자동차 3사는 전기차 전환에 거액을 투자하고 있지만, 아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포드만 해도 전기차 사업에서 올해 45억 달러 손실이 예상된다. 노조 요구를 다 들어주면 인건비가 테슬라의 두 배에 달할 것이라고 포드 사측은 주장한다. 이는 전기차 투자 여력을 훼손하고 경쟁력도 떨어뜨린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그러나 돈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일자리다. 뉴욕타임스(NYT)는 “근로자들의 최대 우려는 전기차가 가솔린 차량보다 적은 부품을 쓰기 때문에 많은 일자리가 쓸모없게 될 것이라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기존 내연기관 공장이 문을 닫고 전기차·배터리 공장은 새로 생겨나는 구조조정이 활발한 상황이다. 신산업 태동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상당수 근로자가 새로운 공장으로 옮겨가겠지만, 전체적으론 일자리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UAW는 전기차 공장과 배터리 합작 공장 근로자 보호를 주장하면서 사측과 대립 중이다.

이런 가운데 전기차는 미국 대선의 핵심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내연기관 포기는 끝없는 실업과 인플레이션으로 전환하는 게 될 것”이라고 바이든 정부의 전기차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자동차 산업과 일자리에 대한 정부의 암살”이라는 극단적 표현까지 동원했다.

트럼프뿐만이 아니다. 론 드산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 등 공화당의 다른 대선 주자들도 전기차 확대 조치로 인해 배터리 광물과 제조를 통제하는 중국에 일자리와 국가 안보를 넘겨주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기차 전환이 늦으면 늦을수록 미국 자동차 산업의 장래는 어두워진다. ‘현재 일자리 대 미래 일자리의 대결’이기도 하다. 바이든 선거캠프의 케빈 무노즈 대변인은 “트럼프식이라면 미래의 일자리는 중국으로 갈 것”이라고 반박했다.

중국산 전기차 기하급수적 증가

전기차 역풍을 가져온 결정적 요인은 ‘차이나 포비아(중국 공포증)’다. 특히 유럽이 심하다. EU 내 중국산 전기차 점유율은 2019년 0.5%에 불과했지만, 3년 만인 2022년 8.2%로 뛰어올랐다. 이런 추세라면 2025년엔 중국산 점유율이 15%까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 EU 집행위원회 분석이다. EU 내에선 2035년 내연기관 퇴출이라는 강력한 전기차 육성 정책의 과실을 중국이 가져가고 유럽 전기차는 고사할 것이란 위기감이 팽배하다.

중국산 전기차의 최대 경쟁력은 가격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EU는 중국산 전기차가 중국 정부의 보조금을 등에 업고 유럽 판매가를 20% 정도 낮출 수 있었다고 본다.

세계 무역장벽 더 높아질 수도

그러나 EU의 대중 보조금 조사가 제재성 관세 부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중국의 보복도 의식되지만, 무엇보다 EU 회원국과 중국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강경하지만 독일은 미온적이다. 중국은 독일 자동차의 주요 수출 시장일 뿐 아니라 메르세데스-벤츠, BMW 등 독일 자동차 회사들이 이미 중국 회사와 전기차 합작 공장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종합하면 확대일로에 있던 전기차 시장이 주요국에서 복병을 만난 것은 맞다. 그러나 전기차 전환이라는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다.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 배출량을 제로(0)로 만드는 탄소중립을 위해선 내연기관 차량 중지와 전기차 도입은 불가피하다.

그렇더라도 각국의 선거와 정치 상황, 전기차 패권을 둘러싼 국제정치는 단기 시장판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보여주듯 무역 장벽이 더 높아질 소지가 다분하다.

이런 상황은 한국 경제에도 악재다. 현대차와 기아 등 완성차 업계는 물론 이차전지 산업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최근 이차전지 업체 주가가 약세를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세계 각국에서 펼쳐지는 ‘전기차 정치’를 주시할 수밖에 없게 됐다.

원자재부터 완성차까지…전기차 최강국 중국

중국은 지난해 독일을 뛰어넘은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엔 일본마저 제치고 세계 1위 자동차 수출국에 올랐다. 그 중심에 전기차가 있다. 올 상반기 전기차(하이브리드 차량 포함) 수출 비중은 전체 자동차 수출의 52%를 차지해 내연기관 차량 수출을 능가했다.

우선 중국 시장 자체가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이다. 중국자동차제조업협회에 따르면 2022년 중국에서 680만 대의 전기차가 팔렸다. 같은 해 미국 시장 전기차 판매는 약 80만 대에 불과했다. 자동차 산업 후발국이었던 중국은 어떻게 전기차 시장 지배자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MIT 테크놀로지 리뷰에 따르면 변곡점은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였다. 2009년 중국은 세계 최대 자동차 생산국이 됐다. 그러나 중국 자동차 업체들의 경쟁력은 미국·독일·일본 회사들과 비교가 안 됐다. 중국은 기존 자동차 강국이 자만심에 취해 큰 관심을 두지 않던 전기차로 눈을 돌렸다. 극심한 대기 오염 억제와 석유 수입 감소에 큰 도움이 되리란 기대도 있었다.

일단 방향을 정하자 중국 특유의 산업정책이 가동됐다. 전기차 업계에 막대한 세금 감면과 보조금이 지급됐다. 2009년부터 2022년까지 정부가 쏟아부은 관련 보조금과 세금 감면 규모만 약 290억 달러였다. 버스·택시 등 공공 교통 시스템에 전기차를 도입해 초기 시장을 조성해주기도 했다. 외국 자동차 회사에 국내 업체와 마찬가지로 보조금을 제공한 것도 주효했다. 이는 테슬라를 비롯한 서방 자동차 회사들이 중국에 대규모 생산 기지를 세우는 촉매로 작용했다. 거대한 전기차 생태계가 만들어지면서 중국 전기차 경쟁력도 함께 향상됐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중국이 전기차의 핵심인 이차전지 산업에서 CATL 등 세계적 업체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리튬·니켈·망간·코발트 등 이차전지의 필수 광물 공급망을 통제하고 있는 점이다. 원자재-배터리-완성차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를 일찌감치 완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