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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너무 성공해도, 실패해도 안 되는 CBDC의 얄궂은 운명

중앙일보

입력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어디로 가나

“조심스럽게 진행하는 게 좋다.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의 실제 도입 여부는 물론, 심지어 CBDC 디자인과 운용도 마찬가지다. 선두 주자의 CBDC 디자인이 먼저 출발한 자의 이득을 누리지 못하고 글로벌 표준에서 이탈할 수 있는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 1980년대 베타맥스와 VHS의 비디오테이프 표준 전쟁처럼 말이다.”(소니의 베타맥스 방식이 시장에 먼저 나왔고 기술도 뛰어났지만 후발주자인 VHS 방식이 승리했다.)

한은, BIS와 손잡고 테스트 추진
“우리가 글로벌 모범답안 될 수도”

자칫 민간 결제시스템 위축 우려
흥행 부진해 존재감 없어도 문제

CBDC 국제표준 여전히 불투명
이창용 “조심스럽게 진행할 것”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년 전인 지난해 9월 한국의 CBDC 모의실험에서 얻은 교훈을 주제로 국제통화기금(IMF) 싱가포르교육센터(STI)와의 웨비나 기조연설에서 한 말이다. 한국은 2021년 8월~2022년 6월 CBDC 모의실험을, 2022년 7~12월 금융기관과의 연계실험을 실시했다.

“테스트는 ‘잘 규율된 혁신’의 과정”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CBDC)를 둘러싸고 전 세계 중앙은행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한국도 국제결제은행(BIS)과 손을 잡고 기관용 CBDC를 테스트하기로 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CBDC)를 둘러싸고 전 세계 중앙은행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한국도 국제결제은행(BIS)과 손을 잡고 기관용 CBDC를 테스트하기로 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신중한 행보를 이어오던 한국은행이 CBDC를 향한 의미 있는 한걸음을 내디뎠다. 지난 4일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은 국제결제은행(BIS)과 협력해 미래 통화 인프라 구축을 위한 ‘CBDC 활용성 테스트’를 공동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기관용 CBDC를 기반으로 은행이 ‘예금 토큰’을 발행하고 개인 간 거래에 이를 활용하는 테스트도 내년 4분기에 실시된다. 이날 행사에서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이번 테스트는 혁신의 동력을 살리면서 소비자 피해, 시장질서 교란을 막는 ‘잘 규율된 혁신(well-regulated innovation)’의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는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다. 비트코인 같은 가산자산과 다른 법정 통화 즉. 법화(法貨)라는 의미다. CBDC는 활용범위와 사용 주체에 따라 범용(retail)과 기관용(wholesale)으로 나뉜다. 범용은 가계·기업에 직접 발행해 현금처럼 일상생활에서 사용된다. 기관용은 금융기관에 발행돼 기관 간 자금거래와 최종 결제 등에 활용된다.

스마트 계약으로 미리 프로그램 가능

 예금 토큰은 스마트 계약을 활용해 미리 원하는 결제를 프로그램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코로나19 당시 소비 진작을 위해 카드 결제 방식을 통한 정부 지원금을 뿌렸는데 이를 더 정교하게 프로그램할 수 있다. 정부 지원금이 소비 대신 애먼 곳에 쓰이는 사태를 확실히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윤성관 한은 디지털화폐연구부장은 “예금 토큰은 조건부 지급 방식의 기부금, 명의와 자금이 동시에 이전돼야 하는 중고차 매매 등에 활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CBDC 논의는 전 세계에서 2010년 후반부터 활발하게 진행됐다. BIS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 세계 중앙은행의 93%가 CBDC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고 바하마(2020년 10월), 나이지리아(2021년 10월) 등 일부 신흥국은 범용 CBDC를 이미 도입했다. 중국도 시범운영을 확대하고 있고 유럽중앙은행(ECB) 역시 도입을 준비 중이다. 현금 이용이 줄고 경제·금융의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하면서 중앙은행도 팔짱 끼고 앉아 있을 수 없게 됐다. 현금을 쓰지 않아 중앙은행 화폐가 유명무실해지면 통화시스템의 근간(anchor)이 사라져 화폐와 지급결제시스템에 혼란이 생길 수 있다. 빅테크가 주도하는 민간 지급서비스에만 의존하면 금융 안정과 소비자 보호 측면에서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특히 지난 8월 페이팔이 글로벌 스테이블코인을 출시한 이후 규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2019년에도 페이스북(현재의 메타)이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리브라’ 출시 계획을 발표하자 주요 7개국(G7)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스테이블코인이 충분한 규제 없이 일상적인 지급 수단으로 확산하면 ▶대규모 인출 사태(코인런)로 금융 불안정 ▶은행 자금중개기능 약화 ▶불법 외환 유출 ▶지급결제 안정성 훼손 등의 위험요인이 있다고 한은은 분석했다. 빅테크 기업에 데이터가 집중되고 시장지배력이 커지면 한두 개 기업에 정책이 휘둘릴 가능성도 있다.

혁신과 안정성, 프라이버시와 규준 충돌

 한국은행은 그동안 범용 CBDC를 중심으로 연구를 해왔다. 2021~22년의 모의실험도 분산원장  기술 기반의 범용 CBDC 시스템의 기술적 구현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검증했다. 이창용 총재는 지난해 9월 IMF-STI 연설에서 지난 실험의 교훈을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 CBDC 도입은 기술 개발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다양한 목표 간의 균형을 잡는 일이다. 이 총재는 “모든 목표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완벽한 기술이나 CBDC 디자인은 없다”고 말했다. “당장 급할 게 없어서 혁명적인 혁신으로 평가되는 분산원장 기술(DLT)을 적용했다. DLT는 탈중심의 메타버스 환경에서 매우 잠재력이 있다. 그러나 혁신과 안정성 간의 상충관계가 있었다. 한국 경제에서 범용 CBDC를 지원하는 DLT는 확장성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DLT 기술이 더 발전하지 않는 한, 일상적인 온-오프라인 상거래에서 CBDC보다 표준적인 중앙집중식 통합원장을 쓰는 게 낫다고 봤다.”

 프라이버시(개인정보 보호)와 규제 준수(컴플라이언스)의 충돌도 고민이었다. 실험 초기에는 익명성과 프라이버시를 높은 수준으로 보장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법원 판결에 따른 계좌 동결 같은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결국 프라이버시를 희생해 규제 준수 수준을 높여야 했다.

 둘째, 성공적인 CBDC 개발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CBDC가 너무 성공적이면 민간의 결제시스템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 반면, 충분히 성공적이지 못하면 수요가 부족해 존재감이 사라진다. 실험해 보니 후자의 위험이 더 컸다. 핀테크나 신용카드처럼 사용에 따른 보너스 포인트를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총재는 “범용 CBDC가 성공하려면 최종 사용자 입장에서 편의성, 다양성, 인센티브를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론은 기관용 CBDC였다. 주로 신흥국이 범용 CBDC가 도입하는 것은 금융서비스의 접근성을 높이는 금융 포용성 때문이다. 계좌보유율이 거의 100%에 달하고 다양한 디지털 결제서비스가 이미 도입된 한국에선 그 중요성이 떨어진다. 이 총재는 기관용 CBDC에 우선 더 집중하고 이를 범용 CBDC에 결합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한은-은행권 2단계 시스템 유지할 듯

 최근에는 미국 뉴욕연준, 브라질 중앙은행, 싱가포르 통화청 등을 중심으로 분산원장 기술을 적용한 새로운 플랫폼 상에서 금융기관이 예금 등을 발행하고 기관용 CBDC는 최종 결제 등을 지원하는 쪽의 연구·개발이 확대되는 분위기다. 지금과 같은 중앙은행과 시중은행의 2단계 시스템(two-tier system)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안정감이 있다. BIS도 이 방향에 힘을 싣고 있다.

 한은은 “아직 결정된 게 없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하지만 이형주 금융위 금융정책국장은 4일 기자회견에서 “이번 테스트를 통해 한국에서 합리적인 안이 만들어진다면 글로벌 모범답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CBDC 도입 과정에서 은행 요구불예금이 축소된다든지, 네이버페이 같은 민간의 결제시스템이 위축되지 않도록 잘 조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CBDC는 지나치게 성공해도 불편하고, 그렇다고 성공하지 못해 존재감이 아예 없어도 안 되는 얄궂은 운명의 줄타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토큰(token): 버스 토큰처럼 경제적 가치가 있는 거래나 이전될 수 있는 증표다. 최근 들어선 주로 가상자산 등과 같이 프로그래밍 기능이 내재된 분산원장기술 플랫폼에서 발행·유통되는 전자 증표를 말한다.

·토큰화: 자산을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플랫폼 상의 디지털 토큰으로 변환하는 프로세스. 토큰화를 하면 즉시성, 투명성, 자동화의 장점이 있다(OECD). 스마트계약을 통한 조건부 거래도 가능하다.

·예금 토큰(tokenized deposits): 은행이 기관용 CBDC를 기반으로 분산원장 기술 등을 이용해 발행하는 예금과 유사한 형태의 디지털 자산. 스마트계약 등 프로그래밍 기능을 통해 혁신적인 지급 및 결제 서비스를 손쉽게 구현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 달러 등 기존 법정 화폐 가치와 1대 1로 연동된 암호화폐. 가격 변동성이 적어 디지털 결제 등에 쓸 수 있다.

·분산원장기술(distributed ledger technology, DLT): CBDC의 발행·유통·환수 등에 있어 참가기관 및 개별 이용자의 CBDC 잔액 및 거래정보를 기록하는 장부(ledger)가 여러 곳에 분산된다. 분산원장의 처리속도는 현재로서는 기존 시스템에 비해 다소 느리지만 기술 발전으로 처리속도가 개선되고 있다.

·통합원장(unified ledger): 중앙집중형 단일원장 방식. BIS는 2023년 연차보고서에서 통합원장을 미래 화폐시스템의 청사진으로 제시했다.

글 = 서경호 논설위원 그림 = 임근홍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