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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정보철학, 마키아벨리가 씨 뿌리고 홉스가 꽃 피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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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호 26면

[제3전선, 정보전쟁] 철학자와 스파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은 정보의 세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철학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성경, 손자병법과 같은 고전은 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토마스 홉스, 이마뉴엘 칸트와 같은 지성들이 정보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같은 노력이 오늘날 정보의 제도적 발전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몽테스키외 “대사는 국가의 눈·귀 돼야”

니콜로 마키아벨리 : 15세기와 16세기 이태리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국 서기장을 역임했으며 『군주론』외에도 『로마사 논고』 『전략론』 등 명저를 남겼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 15세기와 16세기 이태리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국 서기장을 역임했으며 『군주론』외에도 『로마사 논고』 『전략론』 등 명저를 남겼다.

시대를 초월해 철학적 사유의 자양분을 제공하는 『성경』은 이스라엘민족의 생존형 정보철학을 보여주고 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있도록 12명의 비밀요원을 선발해 가나안 땅에 대한 정보수집을 지시했다(민수기 제13장).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도 약속의 땅 여리고성 정복을 위해 정보부터 수집했다(여호수아 제2장). 힘이 약했던 이스라엘민족은 안전한 삶의 터전을 확보하기 위해 무엇보다 정보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같은 정보철학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이스라엘 민족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모사드 정신의 뿌리가 됐다.

중국 춘추 전국시대의 손자병법도 국가지도자의 정보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먼저, 전쟁은 엄청난 희생을 가져오므로 국가지도자는 전쟁 예방을 위해 평소에도 부단히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전쟁에 패할 경우 뒤따를 막대한 피해를 직시해 정보예산과 인력을 아끼지 말 것도 강조했다. 손자병법은 훈계에만 그치지 않았다. 스파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5대 원칙도 알려주었다. 현지인을 고정간첩으로 활용하는 향간(鄕間), 적국의 관리를 스파이로 활용하는 내간(內間), 적의 간첩을 포섭하여 이중간첩으로 활용하는 반간(反間), 적에게 역정보를 흘리기위해 일부러 잡혀 주는 사간(死間), 그리고 적정을 정탐하고 귀환하는 생간(生間) 등 5가지 방법을 적절히 활용하도록 가르쳐 주었다. 중세시대 몽골이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아랍 대상(隊商)과 이태리 상인들에게 무역권을 주고 정복지의 정보를 수집하도록 포섭한 것은 향간과 반간에 해당한다. 또한 내간과 생간은 오늘날 대부분 국가들의 보편적인 정보수집 방법이 되고 있다. 이처럼 손자병법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해 오늘날까지 정보활동의 전형이 되고 있다. 기원전 600년에 이미 정보에 대한 철학적 가르침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은 참 놀랍다.

토마스 홉스 : 1651년 명저 『리바이어던』을 통해 국가는 강력한 주권을 확립하여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마스 홉스 : 1651년 명저 『리바이어던』을 통해 국가는 강력한 주권을 확립하여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 문명의 혁신을 불러온 르네상스는 근대 정보철학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르네상스시대 들어 교회중심의 중세질서가 저물고 새로운 근대국가가 나타나자, 이들간 세력경쟁이 거듭되는 격변의 시대가 열였다. 이 과정에서 상대의 의중과 정세파악이 중요해졌으며, 자연히 정보수요의 증가로 이어졌다. 이즈음 상주대사 제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같은 시대적 배경이 작용했다. 상주대사는 외교관 신분으로 여행이 자유롭고 고위관료와 학자·종교인 등 현지 유력인사와 교류가 가능해 국가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쉽게 수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스키외가 대사는 ‘국가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정보사무가 국가의 중요한 임무로 인식되면서 근대철학이 정보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다.

이태리 피렌체 공화국의 마키아벨리가 근대 정보철학의 문을 열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그의 말처럼 마키아벨리의 철학은 현실 직시의 토대 위에 지극히 목적 지향적이다. 자신의 국가인 피렌체가 공화정 체제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군대를 두지 않아 주변국들로부터 자주 침공당하자, 아무리 좋은 정책과 목적이라 하더라도 미덕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좋은 목적이라면 기만·권모술수와 같은 교활함과 악덕도 정당하다고 보았다. 이 같은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은 정보가 추구하는 철학과 매우 일치한다. 정보의 기본철학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좋은 결과만 낼 수 있다면 도덕·비도덕을 따지지 말고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키아벨리의 경력을 보면 그의 정치철학에 정보철학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여느 철학자와 달리 정보업무를 직접 수행한 사상가였다. 29세에 피렌체의 외교·군사 실무를 담당하는 제2서기국의 서기장에 임명된 그는 외교·군사업무 수행 과정에서 정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당시 피렌체의 핵심 안보현안인 교황 및 독일, 프랑스, 스페인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현지를 방문해 정보를 수집했다. 이처럼 마키아벨리는 외교·군사는 물론 정보업무까지도 담당한 국가안보 최고위급 실무자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에는 곧 정보철학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국의 홉스는 마키아벨리의 정보철학을 좀 더 독립적으로 발전시켰다. 근대국가의 이론적 토대를 닦은 홉스는 국민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국가의 고유 역할이라고 보았다. 그 연장선상에서 정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는데 정보가 바로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정보활동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의무인 동시에 국가의 고유한 권리라고 보았다. 철학사 최초로 정보를 독립변수로 인식하면서 정보의 필요성, 중요성, 정당성을 정치철학적으로 풀어냈다. 마키아벨리가 근대 정보철학의 씨를 뿌렸다면, 홉스가 꽃을 피웠다.

국력에 걸맞게 정보철학 재정립 필요

칸트 :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평가받는 칸트는 독일 관념 철학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서양 근대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였다.

칸트 :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평가받는 칸트는 독일 관념 철학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서양 근대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생각이 달랐다. 칸트는 모든 이성적 존재는 공동체 전체의 선을 추구할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국가공동체 전체도 전쟁이 없는 영구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전쟁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어떤 국가도 평화를 위협하는 불신행위는 절대 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비밀 정보활동은 국가 간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비록 비밀 정보활동의 필요성과 당위성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국가공동체 전체의 평화유지를 위해 비밀 정보활동은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 『영구평화론』과 『도덕의 형이상학』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칸트는 비밀리에 스파이를 잠입시켜 다른 나라를 정탐하는 행위 또는 암살과 같은 비윤리적 행위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비밀활동은 국가간 평화의 전제조건인 신뢰를 깨는 원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손무 :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손무(孫武)의 초상화. 손무는 중국 춘추전국 시대 군사전략가이자 철학자이다.

손무 :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손무(孫武)의 초상화. 손무는 중국 춘추전국 시대 군사전략가이자 철학자이다.

그렇지만 칸트의 생각은 제1·2차 세계대전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양차 대전 앞에서 국가들은 칸트의 이상적 정보철학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존망의 전쟁 앞에서 정보활동을 경쟁적으로 확대했다. 칸트의 생각과 반대로 움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칸트의 정보철학이 모두 사장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국익경쟁 심화에 따른 과잉 정보활동, 인권과 민주적 가치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정보활동, 국민들에게 심한 정서적 비호감을 자아내는 정보활동에 대해 윤리적 논란이 빈발하자, 칸트의 정보철학에 다시 눈길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는 국가의 생존과 국민의 안전을 위해 필수적이므로 그 자체는 ‘윤리적으로도 합당’하지만, 인간의 기본적 윤리에 배치되는 정보활동에 대해서는 칸트적 관점에서 다시 보자는 것이다. 미국이 적국 지도자에 대한 암살 행위 등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것도 이러한 정보윤리가 반영된 것이다.

정보전쟁

정보전쟁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은 모든 인류문명의 발전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다. 그 속에서 정보도 오늘과 같은 철학적, 제도적 발전을 이룩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주의 정보철학이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과도한 정보활동에 대해서는 칸트적 정보윤리가 나침판 역할을 하면서 보정해 주고 있다. 정보선진국들이 과잉정보 활동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규제하되, 국가가 반드시 필요로 하는 정보활동에 대해서는 특별 정보법원 등을 신설하여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은 그 예이다. 미국과 영국처럼 정보선진국들이 국가 정보사무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예산·인력 투입 등 단순히 물리적 요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 정보사무의 책무와 비전에 대한 철학적 뒷받침이 있기때문에 가능했다. 우리도 세계 10위권의 국력에 맞게 정보철학의 재정립을 기대해 본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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