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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온정 악용, 브란트 총리 비서로 침투한 동독 스파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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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호 26면

[제3전선, 정보전쟁] 독일 기욤 사건 재조명

기욤 비서관으로부터 보고받고 있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중앙포토]

기욤 비서관으로부터 보고받고 있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중앙포토]

분단국간 정보전은 개방된 사회가 불리하다. 분단국은 언어·문화·생활방식이 같아 기본적으로 상호 스파이 침투가 용이하지만, 개방된 사회는 외부 수용성이 높아 스파이들이 침투하기가 통제된 사회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 분단국간 정보전은 민족적 온정을 역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많아 아픔도 크다. 1974년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의 사임을 몰고 온 동독 스파이 권터 기욤 사건은 분단국 정보전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1956년 5월 12일 기욤과 아내 크리스텔은 여느 동독 주민들처럼 가족 상봉을 위해 서독으로 향했다. 서독 프랑크푸르트에 살고있는 장모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욤은 동독 국가보안부(슈타지) 소속 스파이로, 그의 서독행은 서독 정치권에 침투하기 위한 위장 잠입이었다. 이를 위해 기욤은 치밀하게 기획했다. 우선, 자신의 서독 위장 이주에 대비해 장모님을 먼저 서독 프랑크푸르트로 이주시켜 터전을 잡게 했다. 당시 서독 정부는 서독에 친인척이 살고 있는 동독 주민에게 심문없이 이주를 받아 주었는데, 기욤은 서독당국의 심문을 피하기 위해 장모님의 거처를 미리 서독에 옮겨 놓은 것이다.

담배 가게·커피점 운영하며 신분 세탁

기욤과 부인 크리스텔. [중앙포토]

기욤과 부인 크리스텔. [중앙포토]

서독에 안착해서도 기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담배 가게와 커피점을 운영하며 완전한 서독국민으로 신분을 세탁했다. 또한 1957년 서독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서독 정치권에 적응하는 등 드러나지 않게 정치권 침투를 위한 목표를 하나하나 진행시켜 나갔다. 1964년 사민당 프랑크푸르트 지구당 책임자가 된 기욤은 4년 후인 1968년 프랑크푸르트 시의원에 당선되어 원내교섭단체장을 맡는 등 서독 정치인으로서의 변신도 순조롭게 이어나갔다. 특히 1969년 서독 총선은 기욤의 스파이활동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해 총선에서 사민당 거물 정치인 게오르그 레버의 선거본부장을 맡아 그를 당선시키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를 확보했다는 의미이다. 더욱이 그해 총선에서 사민당은 기민당을 물리치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그리고 사민당대표 브란트가 총리에 취임했다.

사민당의 집권으로 기욤의 스파이 활동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교통부 장관에 오른 게오르그 레버가 기욤의 남다른 성실성과 정무능력을 높이 사 총리실에 추천했고, 총리실에서 업무능력과 충성심을 인정받은 기욤은 1972년 드디어 브란트 총리의 개인 비서로 발탁되었다. 서독에 잠입한지 13년만에 최고 목표지점에 침투한 기욤이 사민당 당원으로 오랜 기간 잠복해 있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가 온 것이다. 이를 슬리퍼 스파이(sleeper spy)라 한다. 이때부터 기욤은 중요한 극비정보를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동독에 수시로 보고했다. 브란트총리의 핵심 대외전략인 동방정책의 주요내용은 물론 미·소간 군축회담, 나토(NATO)의 군사동향 등 독일과 유럽안보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기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1973년 닉슨 대통령이 미국과 나토의 재(再) 결속을 다지기 위해 브란트 총리에게 보낸 비밀친서 내용을 보고하는 등 총리비서가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 중요정보들을 넘겼다. 더욱이 브란트 총리의 과도한 음주와 복잡한 여성관계 등 비서만이 알 수 있는 개인정보도 넘겼는데, 이는 동독이 서독에 대해 협박용으로 사용할 경우 심각한 정치·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위험한 정보들이었다. 또한 당시 사민당 실력자로 부상 중인 헬무트 슈미트 의원에 관한 정보 등 서독 정계동향을 손바닥 보듯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정치정보도 정리하여 넘겼다.

동독의 대(對) 서독 스파이 침투는 이뿐만 아니었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가능한 감쪽같은 신분위장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나치박해 등으로 이민 간 서독국민들의 신상정보를 입수해, 이들과 비슷한 동독 정보요원을 선발하여 서독에 침투시키는 방법은 단골 수법이었다. 이렇게 침투한 동독 스파이는 무려 1900여명에 달했고, 동독 스파이들이 포섭한 서독인사들은 공무원, 정치인, 교수 심지어 정보기관 간부 등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약 2만∼3만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들로 부터 나온 정보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슈타지가 세계적 정보기관의 명성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스파이행위는 서독 국내 정보기관인 헌법보호청의 방첩망에 걸려들었다. 기욤도 마찬가지였다. 1973년 헌보청은 과거 동독 슈타지가 보낸 암호통신 내용을 재정리하는 과정에서 1956년 슈타지가 기욤에게 보낸 암호를 발견했다. 1956년 당시에는 기욤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아 무시했던 것을 1973년 발견하여 다시 정밀조사하다가 기욤이 스파이라는 단서를 포착했다. 이에 귄터 놀라우 헌보청장은 내무장관 겐셔에게 보고하면서, “기욤을 계속 감시하여 추가 증거를 확보해야 하므로 당분간 해고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겐셔는 이를 브란트 총리에게 보고했고, 브란트 총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헌보청장, 내무장관, 총리 모두 권력을 이용해 사건을 무마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그 누구도 기욤에 대한 신원검증 실패 책임을 떠넘기려 하지 않았다. 모두 차분하게 대처했다. 그 결과 헌보청은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여 총리에게 보고한 후 1974년 4월 24일 기욤을 체포했다. 징역 13년을 선고받은 기욤은 1981년 동독으로 추방되어 거기서 칼 마르크스 훈장을 받는 등 여생을 편하게 보냈다.

동베를린의 슈타지 본부 본관 건물. [사진 위키피디아]

동베를린의 슈타지 본부 본관 건물. [사진 위키피디아]

그러나 기욤은 서독국민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동서냉전의 엄중한 시기에 긴장완화의 용기를 온몸으로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독일통일의 초석을 닦은 브란트총리가 기욤때문에 허무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1974년 5월 7일 브란트 총리는 “기욤에 대해 주의를 게을리 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난다”는 비통한 사임사를 밝히고 정치권을 떠났다. 이에 서독언론은 “동독을 가장 많이 도와주려 했던 브란트의 등에 동독은 정작 비수를 꽂았다”고 비판했다. 같은 민족만이 느낄 수 있는 진한 슬픔과 아픔이 배어 나온다.

기욤 사건은 유럽 정가에도 아쉬움을 남겼다. 당시 유럽에서는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으로 동서냉전의 긴장완화 훈풍이 불 조짐을 보였다. 소련과 동유럽은 이를 반겼다. 그래서 소련은 기욤의 스파이 활동을 매우 조마조마하게 보면서 동독에게 누차 신중을 당부했다. 총리의 비서인 기욤이 스파이라는 사실이 발각될 경우 브란트 정권이 무너져 긴장완화의 훈풍이 다시 냉각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브란트총리 사임이후 동·서독은 비공식 접촉을 통해 정세 파장을 최소화했으나, 그때 브란트 총리가 사임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유럽 정가에서 회자되곤 한다.

최강 정보력 슈타지, 망국 정보는 못 봐

정보전쟁

정보전쟁

이 사건은 남·북한 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엇보다 분단국간에는 정보전이 더 치열하게 전개된다는 것을 입증했다. 여느 국가들과 달리 분단국은 상대를 굴복시켜 빨리 민족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강해 정보활동이 공격적으로 나타나는데다, 언어·문화·생활습관이 같아 정보전이 구조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개방된 사회가 불리하다는 것도 입증되었다. 독일 통일협상의 대장정을 이끈 볼프강 쇼이블레 서독 내무장관도 이를 인정했다. 그는 회고록 『조약』에서, 서독처럼 개방된 사회의 정보기관은 엄격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의회의 통제까지 받기 때문에 스파이 활동이 제약을 받지만, 공산국가의 정보기관은 법적·제도적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아 정보전에서 항상 동독이 앞섰다고 회고했다. 이는 남북 정보전에서 우리가 구조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북(對北) 정보전과 관련한 정책 및 제도 정비 시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한도 명심할 것이 있다. 어느 석학의 지적처럼 동독 슈타지가 당대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했지만, 정작 자신의 국가가 망해가는 정보는 보지 않았다. 오로지 정권수호 한 방향만 바라보는 슈타지의 외눈박이 정보활동이 오히려 국가를 더 위험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통제된 사회의 정보기관은 자신의 허물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자체 결함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총리 비서를 스파이 혐의로 체포하는 중차대한 사건 앞에서 권력자 모두 엄정한 중립 자세로 책임을 다하는 모습도 인상 깊다.

최성규 고려대 법학연구원 전임연구원.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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