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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캐나다 장애청년…한국이었다면 집조차 못 구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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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적장애인인 20대 제니는 혼자 산다. 3년 반 전 가족을 떠나 홀로서기에 나섰다. 엄마가 그녀를 집에서 내보냈다. 스스로 살 수 있는 능력. 엄마는 제니에게 무엇보다 그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평생 보호받기 보다는, 스스로 헤쳐나가는 삶을 살길 원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서툴기도 하지만 제니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성장해 나간다. 그런 딸을 제니 엄마는 한걸음 뒤에서 조용히 응원하고 있다.

“제니는 크게 성장하고 있어요. 스스로 책임지고 집을 돌보면서 말이죠. 가족이 아닌 친구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걸 즐기는 중이예요. 그것이 바로 삶이니까요.”

한국이었다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제니의 홀로서기는 캐나다 민간단체 ‘라이츠(LIGHTS)’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제니 엄마는 ‘언젠가 나는 죽을 텐데 딸의 삶을 지금 준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에서 제니의 자립을 계획했고 라이츠 도움으로 꿈을 실현했다. 라이츠는 지적장애인 딸을 둔 매리 팻 암스트롱이 2011년 만든 단체다. 18세 이상 지적장애인의 지역사회 정착을 돕는다. 원하는 지역, 주거 형태(자가나 임대), 룸메이트 등을 매칭하고 관련 비용을 지원한다. 단순히 살 곳뿐 아니라 가족과 떨어져 지역사회 내에서 잘살 수 있도록 자원, 네트워킹을 지원한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만난 라이츠의 직원 톰 가스퍼는 “90명의 독립적인 삶을 지원했다”라고 말했다. 지난 8월 22~24일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장애청년 해외연수 프로그램 ‘장애청년드림팀 6대륙에 도전하다’를 동행해 캐나다의 민간 협력 기반 장애인 주거 지원 시스템을 들여다봤다.

캐나다에 사는 지적장애인 제니(왼쪽)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 3년 반 전쯤 '라이츠(LIGHTS)' 지원을 받아 독립했다. 사진 LIGHTS 홈페이지

캐나다에 사는 지적장애인 제니(왼쪽)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 3년 반 전쯤 '라이츠(LIGHTS)' 지원을 받아 독립했다. 사진 LIGHTS 홈페이지

620만명 여명(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장애인인 캐나다에서는 장애인도 비장애인처럼 동등한 주거권을 누릴 수 있도록 정부, 민간이 발 벗고 나선다. 한국의 현실과는 딴판이다. 국내에선 장애인을 주거 약자에 포함해 지원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공공임대주택 비중이 작고 경쟁이 치열하다. 내부적으로 장애인 접근성을 고려한 집을 찾기도 어렵다. 지체장애인인 대학생 김은아(여·20)씨는 “다른 친구들처럼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생활하고 싶지만 ‘베리어프리(장애물 없는 환경)’한 거주지를 찾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시각장애를 가진 임동준(30)씨는 “시각장애인 중에는 안내견과 파트너가 같이 들어가 집에서 생활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집주인이 거부하거나 이웃들 반대에 부딪혀 집을 구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전했다.

2020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시설이 아닌 지역에 거주하는 재가장애인은 262만2950명에 달한다. 상당수(87.2%)는 공동생활가정 등 시설이 아닌 일반 주택에 살고 싶어하며, 이 경우 가족과 함께가 아닌 ‘혼자’ 살고 싶다는 장애인은 43만9000여명(19.2%)에 이른다. 조성민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사무총장은 “비장애 청년들은 취업, 결혼으로 적어도 20대부터 서서히 독립을 시작하는데 상당수 장애 청년들은 꿈꾸기조차 어렵다. 발달장애인들은 특히 부모 사후에는 대안이 없는 상황”이라며 “해외처럼 탈시설을 넘어 탈가족 대책을 논의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캐나다에선 주택 건설 단계에서부터 유니버설 디자인(UD)을 강조한다. 사진은 UD가 부엌에 적용된 사례로 알파벳 A~G는 장애인들에게 편리한 오븐, 바닥, 싱크대 손잡이 등을 가리킨다. 사진 CHMC 제공

캐나다에선 주택 건설 단계에서부터 유니버설 디자인(UD)을 강조한다. 사진은 UD가 부엌에 적용된 사례로 알파벳 A~G는 장애인들에게 편리한 오븐, 바닥, 싱크대 손잡이 등을 가리킨다. 사진 CHMC 제공

전문가들은 또 장애인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환경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장애인 주거권을 위해 중요하다고 말한다. 캐나다는 특정 대상을 염두에 둔 배리어프리에서 더 나아가 ‘유니버설 디자인(UD)’을 주택 건설 단계에서부터 적용한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연령·성별·국적 장애 유무 등에 관계없이 사회 구성원 모두를 배려한 개념이다. 장애인뿐 아니라 고령자 등 다양한 신체 조건의 사용자가 쓰기 편한 설계와 디자인을 집과 건물을 지을 때부터 고려하는 것이다. 국내에선 공공장소 등 제한적인 상황에서 UD 논의가 이제 막 이뤄지고 있으며, 일부 저소득 장애인 위주로 주택 개조를 지원하지만 상당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지낸다. 캐나다 주택 정책을 총괄하는 CMHC(캐나다모기지주택공사)의 카밀 파라그는 “모든 사람에게 접근 가능한 주택을 제공하는 게 국가 주택 전략의 목표”라며 “장벽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건 접근성이 모두에게 큰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비영리 단체인 AAC(접근성 촉진 연합)는 이런 중요성을 건설업자 등에 정기적으로 교육한다. AAC의 루크 앤더슨은 “건설업자들은 이익 때문에 애초 접근 가능한 주택을 설계하는 데 주저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하는 게 더 이익이란 점을 알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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