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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정부는 영원히 피만 빨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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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일론 머스크가 세운 우주기업 스페이스X는 정부 R&D 예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지 보여준다. 로이터=연합뉴스

일론 머스크가 세운 우주기업 스페이스X는 정부 R&D 예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지 보여준다. 로이터=연합뉴스

윤석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논란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카르텔의 세금 나눠 먹기 방지책이라며 정부 방침을 지지하는 측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선 세금 몇푼 아끼겠다고 첨단산업 발전에 발목을 잡는 악수라며 비판한다. 이와 관련해 양측 모두 주목할만한 사례가 월터 아이작슨의 신작 『일론 머스크』에 등장한다. 머스크가 세운 민간 우주기업 스페이스X 얘기다.

전 세계적인 혁신산업을 주도하는 미국도 우주·방산 산업만큼은 공고한 민관 카르텔이 빚어내는 국가 예산 낭비가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가령 보잉과 록히드마틴 등 대형 방산기업들은 원가가산 방식으로 정부의 우주·국방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예산을 초과해서 쓸수록 더 많은 돈을 지원받는, 쉽게 말해 세금을 더 많이 쓸수록 기업은 더 많은 이익을 얻는 구조다. 더 값싼 부품을 찾고, 일정을 단축해 원가를 줄일 동기가 없다. 당연히 혁신도 없다.

예산 구조 바꿔 카르텔 깬 머스크
규모만큼 방식 중요성 일깨워
셀트리온 R&D 실패 답습 말자

설립 2년만인 2004년 스페이스X가 미 항공우주국(NASA) 프로젝트를 따내자마자 머스크는 이 안락한 관행에 문제를 제기했다. NASA와 국방부가 해오던 원가가산 방식 계약을 거부하고, 대신 회삿돈으로 우선 로켓을 만든 후 정부와 약속한 이정표에 도달했을 때만 대금을 받기로 했다. "원가가산 방식 계약이 지속하는 한 정부는 영원히 피만 빨린다"고 정부에 경고하며 편안한 돈벌이를 버리고 리스크를 떠안았다.

결과는 어땠을까. 세 번의 실패 끝에 2008년 스페이스X의 팰컨 1호가 우주 궤도에 진입한 최초의 민간 제작 로켓이라는 역사를 썼다. 보잉의 비슷한 사업부(5만 명)의 1%에 불과한 500명의 직원으로 이뤄낸 성과였다. 그해 말 NASA와 우주정거장을 12회 왕복하는 16억 달러 규모 계약을 체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왕복에 성공해야만 대금을 받는 계약이었기에 비용 절감에 초점을 맞췄다. 기존에 200만 달러였던 발사대의 크레인 한 쌍 비용은 30만 달러로 낮췄다. 록히드와 보잉의 합작투자사가 구축한 유사한 발사 단지의 10분의 1 비용으로 발사 단지를 재건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경비 절감과 혁신 제작 기술을 이뤄냈다.

NASA는 2014년 우주정거장에 우주비행사를 데려갈 로켓 제작을 위해 스페이스X와 보잉 두 군데와 동시에 계약을 체결했다. 경쟁을 붙이며 보잉에는 스페이스X보다 40% 더 많이 지원하기로 했다. 스페이스X가 2020년 미션에 성공하는 순간까지 보잉은 우주정거장에 도킹하는 무인 시험비행조차 성공하지 못했다. 우주비행사를 보내려면 러시아 로켓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쇠락한 미국 우주산업을 되살려낸 건 이렇게 낭비가 아닌 성과에 보상하는 방식으로 혁신을 이뤄낸 스페이스X였다.

문재인 정부는 국산 코로나19 치료제를 만든다며 셀트리온 한 기업에만 관련 R&D 예산 63%를 쏟아부었다. 당초 잡힌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비용이 투입됐지만 결국 실패했다. 등진 사람이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자리를 함께한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정부는 국산 코로나19 치료제를 만든다며 셀트리온 한 기업에만 관련 R&D 예산 63%를 쏟아부었다. 당초 잡힌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비용이 투입됐지만 결국 실패했다. 등진 사람이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자리를 함께한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 [청와대사진기자단]

덩치가 크다고, 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한다고 꼭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그저 남의 나라 얘기로 치부하고 말 일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당시 국산 코로나 19 치료제를 만들겠다며 관련 예산 전부를 셀트리온 한곳에 몰아준 사례만 봐도 그렇다. 정부는 당시 셀트리온 치료제 렉키로나주의 임상 1·2상 지원에 50억원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2021년 실제 지원된 건 당초 약속의 4배가 넘는 220억원이었다. 2020~2022년 복지부가 백신 및 치료제에 지원한 전체 R&D 예산 832억원 가운데 522억원(63%)을 셀트리온에만 투입하고도 결국 실패로 끝났다. 셀트리온의 구체적인 예산 집행 내역은 알 수 없지만 50억원으로 예정된 예산이 5개월 동안 4배나 더 늘어 집행된 걸 보면 미국 우주산업의 원가가산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마 국비가 투입된 다른 민간 지원 R&D 예산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방만하게 세금이 쓰이는 동안 문 대통령과 당시 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 그리고 코로나를 담당하던 복지부 고위 관료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렉키로나주를 홍보해준 덕분에 셀트리온 주가 상승으로 서정진 회장 주식 가치만 수조 원대로 늘어났다. 만약 머스크식의 성과 보상 방식을 도입했다면 어땠을까. 성과까지 바뀌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투입된 세금은 크게 줄지 않았을까.

기초과학 연구 수준의 척도인 노벨 과학상은 연구에서 수상까지 보통 30~40년의 시차가 있다. 이번 연구비 삭감이 반도체 등 모든 첨단산업의 핵심으로 쓰일 기초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우려가 기우만은 아니다. 당장 돈은 안 되지만 꼭 필요한 장기 기초연구는 몰라도 단기 성과를 위한 예산 투입만큼은 머스크 방식을 한번 도입해보면 어떨까.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