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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과의 전쟁, 성패는 가격에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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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한영익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한영익 사회부 기자

한영익 사회부 기자

지난달 8일 경찰 마약수사관들 사이에서는 “영등포경찰서 대박 터졌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영등포서에서 이날 필로폰 27.8㎏(92만6000명분, 834억원 상당)을 압수했기 때문이다. 합성마약도 아닌 순수 필로폰을 수십㎏ 단위로 압수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문 일이다. 경찰은 추적 끝에 한국·중국·말레이시아 3국에 걸친 대규모 마약 유통조직의 실체도 확인했다.

주범 검거를 위해 보도가 유예돼 지난 10일 알려진 이 사건의 반향은 크지 않았다. 마약 사건이 일상이 됐기 때문이다. 4월 강남 학원가 마약음료 사건, 9월 서울 용산의 집단 마약파티 참석 경찰관 추락사 등 충격적 마약 사건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마당에 필로폰 대량 압수가 특별히 눈에 띄는 일이라고 하긴 어렵다.

서울 영등포경찰서가 압수해 지난 10일 공개한 필로폰. 27.8㎏에 달한다. [사진 영등포경찰서]

서울 영등포경찰서가 압수해 지난 10일 공개한 필로폰. 27.8㎏에 달한다. [사진 영등포경찰서]

더욱이 역대급 마약 압수 사건은 앞으로 자주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국내 마약생태계가 날이 갈수록 견고해지고 있어서다. 지난해 마약사범(1만8395명)은 2021년(1만6153명) 대비 13.9% 늘어났다. 더 심각한 건 세부지표다. 마약류 압수량은 51.4%(377㎏→571㎏), 밀수사범이 72.5%(807명→1392명) 폭증했다. 투약자보다 공급책이, 마약사범보다 유통량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공고한 생태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건 마약에 책정된 가격이다. 암거래 시장의 마약값에는 원가·물류비, 거래에 따른 위험비용 등이 종합적으로 반영된다. 최근 국내 필로폰 1g 소매가는 60만원 전후로 책정돼있다. 2010년대 100만원에서 40%가 떨어졌다. 최저임금(9620원)은 2010년(4110원) 보다 두 배 넘게 오른 걸 감안하면 사실상 폭락이다. 미국(1g당 5만8000원)·태국(1만7000원)의 필로폰 값이 저렴해 가격이 더 내려갈 여지도 있다. 진입 장벽을 낮춘 마약은 신규 수요를 창출한다. 경찰의 4~7월 집중단속에서 20대(30.9%)와 30대(21.8%)가 전체 마약사범의 절반 이상을 기록했다. 한 경찰 간부는 “아무리 잡아도 마약값이 계속 떨어지는 걸 보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다”고 한탄했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마약과의 전쟁’을 강조해왔다. 4월 전례 없는 규모의 범정부 마약범죄 특별수사본부를 편성한 데 이어, 6월에는 이를 확대·개편했다. 전방위 단속으로 마약 유통의 위험비용을 높여 궁극적으론 마약값도 올리겠단 계산이다. 정책 성패도 결국 가격에 달렸다. 마약사범 검거 홍보보다 ‘마약값이 크게 올랐다’는 발표를 볼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