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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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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SUNDAY국장

예영준 SUNDAY국장

미국의 권력 서열 3위인 하원의장이 해임당하는, 그것도 자신이 속한 공화당 강경파 의원의 반란에 의해 축출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초유의 사태라면 한국도 뒤질 게 없다.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로 인한 사법부 수장의 공백 사태가 국내 초유라면 모 장관 후보자의 ‘엑시트’ 소동은 인사청문회 원조격인 미국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당사자와 여당은 정회 선포 뒤 나간 것이니 셀프 퇴장이 아니란 반박을 내놓았지만, 여당 의원의 “갑시다”란 소리에 자료를 챙겨 일어서는 바람에 혼란이 일자 정회를 선포한 것이라 그런 반박은 성립이 안 된다. 편파 진행이 있었다 해도 후보자가 따라 나서서는 안 될 일이었다. 면접시험 응시자가 질문이 마음에 안 든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선 것이나 다를 게 없다. 합격을 포기했거나, 그래도 나를 붙여 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미국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극단적 대결 정치의 귀결이란 점에선 차이가 없다.

2016년 미 연방대법관 인준 거부
이균용 임명 부결 사태와 데자뷔
민주주의 버팀목은 관용과 자제

하버드대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2018년에 펴낸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의원들이 과반을 무기 삼아 대통령 탄핵을 시도하거나 대법관 임명을 가로막는 나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에콰도르나 루마니아 정도를 떠올렸을 것이다. 적어도 미국을 떠올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거명된 두 나라엔 대단히 실례지만 원문 그대로 옮긴 것이다. 여기에 한국이 추가되지 말란 법이 없다.

레비츠키가 민주주의의 붕괴를 보여주는 징표로 든 사례가 바로 2016년 미국 연방대법관 후보자 메릭 갈랜드에 대한 인준 거부다. 연방대법관은 대통령이 후보자를 지명하고 상원 인준을 받아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오바마는 갈랜드를 후임으로 지명했지만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매코널은 “오바마가 누굴 지명하든 청문회도, 표결도 없을 것이다. 2016년이 대통령 선거 해이기 때문에 다음 대통령이 뽑도록 해야 한다”고 제동을 걸었다. 그 뒤 일어난 일들은 모두 매코널의 공언대로였다. 레비츠키는 이 사건을 미 상원이 지켜오던 150여 년 전통을 무너뜨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헌법이 부여한 인준 권한을 마구 휘두르지 않고 대통령의 인사권을 존중해 온 전통이 깨졌다는 것이다(레이건 시절 보크 판사 인준 거부 등 극히 드문 예외가 있었다).  레비츠키가 각국의 사례를 들어 설파한 데 따르면 민주주의의 버팀목은 제도가 아니라 ‘관용과 절제’의 규범이다. 법이 허용한 권한을 절제 없이 행사하는 게 합법이라 해도 때로는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서늘한 경고다.

갈랜드를 이균용으로 바꿔 보면 2016년의 미국 사례와 데자뷔다. 차이가 없지는 않다. 공화당이 “오바마가 누굴 지명하든”이라며 ‘반대를 위한 반대’임을 숨기지 않은 데 비해 한국 민주당은 재산 신고 누락 등 이균용 후보자의 도덕성을 반대 이유로 들었다. 고결무구한 도덕성을 기대하는 수준에는 못 미쳤겠지만 초유의 사법 수장 공백이란 반대급부를 치러야 할 치명적 흠결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거기다 제2, 제3의 후보자도 부결시키고 민변 회장 출신의 대행체제를 만드는 게 민주당의 속셈이란 얘기까지 나온다. 공연한 억측이기를 바랄 뿐이다.

내친김에 레비츠키를 조금 더 인용해 보자.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이 허물어지는 과정의 이면에는 당파적 양극화가 있다. 지난 사반세기에 걸쳐 민주당과 공화당은 경쟁 관계를 넘어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으로 완전히 갈라졌다.” 이게 미국만의 일일까. 극단이 득세하는 상황은 한국 정치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쯤 되면 레비츠키의 책 제목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