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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차·포’ 뗀 대한항공의 아시아나 합병…불가피한 선택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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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강갑생 기자 중앙일보 교통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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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생 교통전문기자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대한민국 항공산업을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고, 공적 자금 투입을 최소화해 국민 부담을 덜기 위해 인수를 결정했다.”(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글로벌 항공운송업이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아 붕괴위기다. 국적 항공사 통합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최대한 높이는 게 최선이다.”(이동걸 당시 산업은행장)

2020년 11월 16일 양대 국적 항공사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이 발표된 이후 나온 주요 언급들이다. 아시아나항공은 같은 해 9월 HDC현대산업개발로의 인수가 무산된 후 산업은행 등 채권단 관리 아래에 들어갔다. 당시 합병 소식에 “세계 7위권의 초대형 항공사가 출범한다”는 장밋빛 전망도 이어졌다. 양사의 국제여객수송 수와 화물운송량 등을 더한 순위였다.

EU 요구에 아시아나 화물 매각
슬롯과 운수권 반납 등 출혈 커
대한항공 “경쟁력 회복 가능해”
“합병 취지 무색” 비판도 많아

EU·미국·일본 승인 절차 남아

인천국제공항에 계류 중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여객기. [연합뉴스]

인천국제공항에 계류 중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여객기. [연합뉴스]

그러나 합병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당초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한항공은 지난 2021년 1월에 미국·EU(유럽연합)·중국·일본·영국 등 14개 경쟁 당국에 기업결합을 신고했다. 대형 항공사 간 합병은 경쟁 관계에 있는 국가의 승인이 필요하다. 필수승인 국가 중 한 곳만 불허해도 합병은 무산된다. 현재는 EU와 미국, 일본의 승인만 남았다.

앞서 대한항공은 영국의 승인 과정에서 아시아나항공이 보유한 런던 히스로공항의 주 7회 ‘슬롯’(Slot, 특정 시간에 이착륙할 권리)을 영국 항공사인 버진애틀랜틱에 넘기기로 했다. 주요 공항의 슬롯은 항공사의 귀한 자산으로 히스로공항은 특히 슬롯 확보가 어려운 것으로 유명하다. 2017년에는 히스로공항의 출발·도착 슬롯 2개가 1000억원에 팔리기도 했다.

또 중국에선 46개의 슬롯을 반납키로 하는 등 적지 않은 출혈이 생긴 탓에 합병 경쟁력이 훼손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샀다. 여기에 최근 대형 악재가 터져 나왔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의 요구로 아시아나항공의 화물 부분을 매각하고, 유럽 4개 노선(프랑크푸르트·바르셀로나·로마·파리)도 반납할 거란 소식이다. 이달 말께 대한항공이 이런 내용을 담은 합병시정서를 제출하면 연말쯤 EC의 결정이 날것이란 예상이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아시아나항공의 화물부문은 지난해 매출이 3조원으로 작년 전체 매출(5조6300억원)의 절반을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장 “차·포 다 뗄 거면 뭐하러 합병을 하느냐” “껍데기만 남기고 합병할 거냐”는 등의 비판이 나온다.

“중장기 경쟁력 위한 불가피한 선택”

하지만 대한항공은 국내 항공산업의 재편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항변한다. 화물부문 매각과 노선·슬롯 반납 등을 하면 단기적으로는 손실이 되겠지만, 합병이 성사되면 양사의 글로벌 네트워크 결합을 통해 중장기적으로는 충분히 경쟁력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항공 화물 분야는 코로나19로 잠시 호황이었을 뿐 대체로 적자 구조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큰 손실은 아니라는 게 대한항공의 설명이다. 이기광 대한항공 전무는 “법적으로 국내 항공사나 기업에 넘겨야 하므로 국부 유출 가능성은 없다”며 “합병이 무산되고 최악의 경우 아시아나항공이 문을 닫게 되면 대규모 실직 사태도 큰 문제지만 그동안 구축해놓은 글로벌 항공네트워크가 무너지기 때문에 우리 항공산업의 경쟁력이 크게 약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진해운 파산 때와 유사한 후폭풍을 우려하는 것이다.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결합 심사 현황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업계 종합, 금융감독원]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결합 심사 현황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업계 종합, 금융감독원]

또 다른 대한항공 관계자는 “해외 대형항공사는 자국의 허브공항에서 최소 50% 이상 슬롯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인천공항에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으로 나뉘어 있는 데다 합쳐도 채 40%가 안 된다”며 “이 상태로는 네트워크 경쟁력이 떨어져 생존이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산업은행도 “합병 작업은 계속 진행돼야 하며 (제삼자 매각 같은) ‘플랜B’는 없다”는 입장이다. 1800%에 육박하는 아시아나항공의 부채비율과 막대한 금융비용 부담 등을 고려하면 제3의 인수자를 찾기는 쉽지 않을 거란 계산도 깔렸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는 합병 방향을 두고 상당한 우려와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익명을 요구한 항공업계 관계자는 “화물까지 매각하면 합병을 통한 시너지가 상당 부분 사라질 수 있다”며 “EU에 양보하면 남은 미국, 일본도 유사한 요구를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업체와 관계 당국 머리 맞대야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는 물론 대통령실에서도 합병과 대한항공의 독점 강화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산업은행에 대해서도 “항공산업의 경쟁력은 고려 없이 자기 부담만 덜어내려고 불합리한 결정을 한 게 아니냐”는 불만이 나온다.

일부에선 대한항공의 모회사인 한진칼에 산업은행이 8000억원(지분율 10.58%)을 투자한 걸 고려해 조원태 회장이 경영권 방어만 염두에 두고 합병에 몰두하는 거 아니냐는 관측도 한다. 물론 대한항공은 “합병 추진은 경영권 방어와는 무관하다”고 반박한다.

전문가들의 시각도 엇갈린다. 박진서 한국교통연구원 항공교통연구본부장은 “지금 상황이라면 합병의 시너지와 경쟁력이 많이 약화할 수밖에 없다”며 “합병 외의 다른 방안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송기한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단순하게 시너지 효과가 없어진다고 판단하기에는 시기상조”라며 “양보로 인한 손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네트워크 재구축과 수익률 증대 전략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합병 과정은 쉽사리 한쪽으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한항공에만 모든 걸 맡기고, 책임도 떠넘기는 모양새는 항공산업의 미래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대한항공과 산업은행, 국토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자들이 시급히 모여 합병 취지와 진행 과정, 전망 등을 엄밀히 따져보고 정책 방향을 재점검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