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움직임을 어떻게 생각할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3일(현지시간) 러시아 극동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3일(현지시간) 러시아 극동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북‧러 정상회담을 놓고 중국은 어떻게 바라봤을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북‧러 정상회담은 북·러 사이의 관계”라며 지지 발언을 하지 않았다. 두 나라의 일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한‧미‧일 vs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가 불편해하는 듯하다. 신냉전 구도가 중국의 국익에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오히려 중국은 10월에 허리펑 부총리와 왕이 외교부장을 미국에 보낼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올 정도로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더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김정은은 이런 중국의 싸늘한 반응을 예상했을까? 김정은은 푸틴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이 불편해할 수 있는 말을 꺼냈다. 그는 “앞으로 지금 시점에서 조러(북러) 관계를 우리 대외정책에서 제1순위로 제일 중시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북한의 대외정책 제1순위를 러시아로 규정해 버렸다. 굳이 이 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김정은의 실수였는지 푸틴 앞에서 립 서비스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중국이 섭섭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말이다.

김정은은 최근 중국에 서운한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지난 7월 27일 정전협정일 70주년을 맞아 중국에 초청장을 보냈다.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7명 가운데 1명을 기대한 것 같다. 왜냐하면 정전협정일은 북‧중이 함께 한 전쟁을 했고 정전협정서에 서명한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은 리훙중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한국 국회 부의장)을 대표단 단장으로 보냈다. 러시아가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을 보낸 것에 비해 격이 떨어졌다. 김정은은 북한 주민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일에 중국은 류궈중 국무원 부총리를 대표단 단장으로 보냈다. 김정은이 또 체면이 서지 않는 인사였다. 리훙중, 류궈중 모두 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24명에 포함되지만, 북한에 비교적 알려지지 않는 사람이다. 북한은 중국이 ‘미국의 눈치’를 본다고 오해할 수 있다.

김정은은 미국과 손잡으려는 중국의 태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푸틴과의 정상회담에서 “러시아를 도와 서방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러시아는 미국과 싸우는데 중국은 미국과 손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상황은 1984년 김일성(북한)-후야오방(중국)-체르넨코(소련)과 비슷하다. 체르넨코는 냉전주의자로서 당시 대서방 강경 입장을 보였다. 체르넨코는 1984년 2월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해 1985년 3월에 사망했다. 고작 1년 정도 권력을 잡았다. 김일성은 당시 중국과 달리 대서방 강경 태도를 보인 체르넨코를 대환영했다. 북한 언론들도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을 찬양하는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김일성은 1984년 5월 16일 전용 열차를 타고 300여 명의 대규모 수행원을 데리고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1961년 10월 소련공산당 제23차 당대회에 참석한 이래 23년 만이다. 그 이전에도 모스크바 방문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체르넨코는 23년 만에 모스크바를 온 김일성을 최고의 예우를 갖추고 접대했다. 그 한 사례로 크렘린 광장에서 환영식을 거행할 정도였다. 그동안 냉각기였던 북‧소 관계가 해빙되는 순간이었다.

김일성-체르넨코 정상회담은 다양한 경제협력뿐 아니라 한‧미‧일 군사협력에 대항하기 위한 북‧소 간 상호 군사지원 협정도 체결했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북한이 1970년 이래 소련에 줄기차게 요구한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기술 및 설비 지원 협정’에 합의했다. 그리고 소련의 신예 전투기 MIG-29도 얻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없는 법.

북한은 소련에 무엇을 주었을까? 소련은 그동안 북한에 지속해서 요구한 것이 있었다. 소련 함정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와 베트남으로 비행이 가능한 영공 개방이다. 북한은 나진‧청진‧원산 등을 소련 함정이 자유롭게 기항할 수 있게 했다. 아울러 소련의 베트남 깜라인만 기지 활성화를 위해 북한 영공을 통과하는 비행 루트를 허용했다.

북한의 이런 조치에 화들짝 놀란 곳은 중국이었다. 소련 항공기가 북한 영공을 통해 중국 지역에 대한 정찰 비행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중국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은 북한의 친소화를 어느 면에서 김일성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1979년 미‧중 수교로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하는 중국이 북한에 편할 리가 없었다. 당시 중국은 미‧일 관계를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가 1984년 3월 베이징을 방문했고,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한 달 뒤 베이징을 찾았다. 이때 김일성은 중국이 이미 사회주의 진영을 떠났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김일성이 중국과의 관계를 아예 끊을 수 없었다. 1984년 5월 16일 소련으로 떠나기 전에 후야오방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평양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체르넨코와 진행 중인 협력 사업의 내용을 사전에 후야오방에게 알려줬다. 그런 탓에 후야오방이 1984년 5월 4일~11일 방북 동안 평양뿐 아니라 중국공산당 총서기치고는 이례적으로 청진‧함흥‧원산 등 지방 도시를 방문한 것이다. 후야오방도 김일성이 궁금해하는 나카소네 일본 총리와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서 거론된 내용을 털어놨다.

김일성은 후야오방에게 중국도 청진항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청진항을 현대화하는데, 중국이 경비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청진항의 이용 대가로 중국은 북한에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북한 화물의 소련 수송에 필요한 신의주~선양을 통한 시베리아 철도 이용 한도를 늘려 주었다.

김일성은 이처럼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과감하게 밀고 당기는 외교로 ‘재미’를 보았다. 과연 김정은은 김일성을 따라 할 수 있을까? 북‧러가 밀착하더라도 시진핑은 과거 후야오방의 길을 가지 않을 듯하다. 중국의 이익은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김일성의 흉내를 내려고 하지만, 한계가 보인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더차이나칼럼

더차이나칼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