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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훈 칼럼

민주당을 기웃거리는 오래된 유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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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최훈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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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석 제1 야당의 실망스럽고 섬찟한 장면은 지난달 국회의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 직후였다. 당내 30여 반란표가 표적이었다. “검찰과 한통속 의원들은 속죄하라”“반드시 대가를 치러야”“끝까지 추적해 정치 생명을 끊을 것”이란 친명계와 개딸들의 ‘색출’‘숙청’ 협박이 이어졌다. “수박(겉은 민주당, 속은 국민의힘)들을 다 박살내자”며 개딸은 14명의 실명 좌표도 찍었다. “라이플 소총” 살해 협박이 뜨고, 비명계 의원들의 사무실로 몰려갔다.

공천 생존이 다급한 일부 의원들은 “난 부결이었다”는 고백에 이어 부결 기표 인증샷까지 올렸다. 비밀투표라는 민주주의 대원칙은 무너졌다. “살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모두 다 인증하라”는 개딸의 압박은 더욱 기세등등하다.

수박색출·낙인찍기·부결 인증샷
‘다름’ 억누른 전체주의 징후 속출
민주화 기여 정통·정체성 회복해
‘다름’ 인정할 자유·민주 모델 돼야

마치 1930년대 정점을 찍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전체주의의 유령이 21세기의 벌건 대낮에 되살아나 기웃거리는 분위기다. 이 거대 정당은 팬데믹이 강제한 전체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었다. 미증유의 공포 속 정부엔 비상 대권이 주어졌다. 마스크와 QR코드, 동선 추적의 족쇄 속에 이동, 경제 활동, 집회의 자유에 제약이 가해졌다. ‘위기 극복’‘전체의 이익’에 복종하며 개인은 사라졌다. 이 공황 상태는 2020년 4월 총선에서 여당에 180여 석을 안겨주었다. 코비드란 괴물에의 두려움이 빚어낸 돌연변이 공룡이다. 코로나 피해 보조란 거부 못할 명분 아래 물 쓰듯 돈을 쓴 문재인 정부였다. 집권 중 416조원 늘어난 965조원(GDP의 47%)의 국가부채를 쌓았다. 지구상 최악의 전체주의인 북한엔 어떤 비판 의식도 없었다. 당내에선 당론(공수처 신설)에 반대한 금태섭 의원을 축출시켰다. ‘자유’란 단어는 자취를 감췄다. 표현의 자유까지 통제하려던 ‘언론중재법’만 불발로 그쳤다.

전체주의는 다름을 용납지 않는다. 집단이 곧추세운 특정 신념, 이데올로기 외엔 반역이다. 그 신념이란 적당한 사실과 통계, 과학을 허구와 섞어 버무려져 대중을 현혹한다. 대개는 선전선동에 능한 영악한 독재자와 결합된다. 제1의 계율은 “지도자는 항상 옳다”다. 나머지는 “파블로프의 개”다. 자유·민주의 반대가 전체주의·독재이니 그야말로 자유·민주와 상극이다.

늘 안팎의 적도 필요하다. 히틀러에겐 유대인, 스탈린에겐 차르·부르주아·지주였다. 논리적 토론, 표현의 자유, 공정한 선거, 독립된 사법부를 경멸했다.

지금 민주당의 제1 계율. ‘이재명 무오류’다. 어떠한 내려놓음과 멈춤, 성찰의 시간도 없이 그는 대선 패배 직후 손쉬운 등원, 당 대표의 길로 갔다. 권력욕·방탄·생존·생계형 궤적 외에 그의 삶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어떤 헌신을 했었는지 명확한 기억이 없다. 규제와 경제위기, 사회의 불공정·불평등, 북한 핵 등 타깃 삼아 극복해야 할 제1당이 오로지 대통령과 일본만을 주적으로 삼는다. ‘묻지마’ 비난의 ‘외눈박이 공룡’이다.

전체주의의 특성은 적에 대한 표지(標識) 낙인이다. 나치는 ‘다윗의 노란 별’을 유대인에게 달았다. 중국 홍위병들은 ‘주자파(자본주의 앞잡이)’‘삼반분자(반마오쩌둥, 반당, 반사회주의적)’가 적힌 나무 팻말과 고깔모자를 씌웠다. 스탈린은 ‘프롤레타리아·인민의 적’이었다. 독재자의 비밀부대들이 어슬렁거리며 분출 대상을 찾는 공격성이 전체주의다. 지금 민주당을 위협하는 ‘수박’의 낙인과 문자폭탄, 좌표찍기의 심리적 테러 조짐이 우려스러운 이유다.

밀고(密告)와 고백은 또 다른 징후다. 1936~38년 스탈린 치하의 ‘모스크바 재판’이 사례. 숙청·처형된 고위 공산당원들이 “트로츠키, 제국주의자와 공모, 소련 체제를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고 자백한다. 짓누르는 공포 속에 동료의 반당을 고하고, 처벌을 낮추려 먼저 적당한 실토를 한다. 요즘 민주당의 비공개 의원총회에선 소신있게 가결의 명분을 설파한 의원들의 실명이 동료들로부터 누출된다. ‘부결 인증샷’ 강요에 이어 “강성파 의원들과는 (녹음이) 두려워 대화조차 못하겠다”는 토로도 들린다.

스스로의 행위가 왜 잘못인지를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야말로 가장 큰 문제다. 집단 최면의 상태인 때문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범 재판에 붙잡혀 온 아돌프 아이히만의 진술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깨달았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며 무비판적으로 명령을 수용하는 일상의 평범함이 큰 악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이었다. “악은 생각지 않는 것이며, 깨우치지 못한 무관심야말로 악의 기원”이란 지적이다.

민주당은 엄혹했던 독재정권 시절 개인의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켜 온 전통과 긍지의 정당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보수 정당을 견제할 세상의 소금 역할을 기대받고 있다. 그러니 스스로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살아 있는 모델이 돼야 한다. 이렇듯 자기 정체성을 무너뜨리면 민주당은 과연 무엇으로 존재하려는가. 어슬렁거리는 악령(惡靈)을 내쫓고, 다름을 포용할 진짜 ‘민주당’으로의 복귀를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