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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휘감는 ‘당론 부결’ 쇼크…사법부 정치화 가속 우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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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황기선 기자 = 국민의힘 의원들이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10회 국회(정기회) 제9차 본회의에서 대법원장(이균용) 임명동의안 부결에 항의하는 팻말을 모니터에 붙이고 있다. 2023.10.6/뉴스1

(서울=뉴스1) 황기선 기자 = 국민의힘 의원들이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10회 국회(정기회) 제9차 본회의에서 대법원장(이균용) 임명동의안 부결에 항의하는 팻말을 모니터에 붙이고 있다. 2023.10.6/뉴스1

대법원장 공석 3주차에 접어든 법원은 “정쟁의 희생양이 됐다”(재경지법 부장판사)는 참담함 속에서 또다시 대통령과 국회의 결단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됐다. 대법원장 후보 임명동의안에 대한 야당의 당론 부결 사태를 지켜본 판사들에게선 “참담하다”“착잡하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일 벌어진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낙마 사태는 사법부 내에서도 ‘꿈에도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악몽’이 현실이 된 셈이다. 이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지난달 19~20일) 직후부터 용산에서 새 후보자를 찾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돌았고, 임명동의안 심사경과보고서 채택 후 본회의 표결까지 일주일 넘게 걸리면서 법원 내에는 설마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준비 부족의 결과”vs“정쟁의 볼모된 것”

낙마의 원인에 대해선 청문회 준비 부족, 후보자의 안일한 태도 등을 되짚는 내인론과 야당의 정치 공세의 희생양이 됐다는 외인론이 분분하다.

한 고법부장 판사는 “법원행정처 인력 부족 등으로 과거에 비하면 청문회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많았다”고 전했다. 이 전 후보자와 같은 시기 연수원을 다녔던 한 판사는 “결격 여부는 보기에 따라 다르겠으나 국민 눈높이에 안 맞는 측면은 있었다”고 말했다. 이 전 후보자와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한 판사는 “진보·보수를 떠나 사실관계 확정에 꼼꼼하고 충실한 분인데, 비상장주식 문제는 안타깝다”면서도 “다른 문제에 대해선 다소 트집 잡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법부가 이렇게 된 것이 참담하다”고 말했다.

고법부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개인 흠결도 낙마 요인 중 하나였겠으나 결정적 요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며 “야당이 대법원장 임명 여부를 정치적 이슈화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여기서 여당도 정치적으로 접근한다면 강대강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판사들은 ‘두 번째 낙마’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서울의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김명수 체제 들어 법원장이나 대법관 등 고위 법관이 되려면 정치적 코드를 맞추는 게 최선이라는 인식이 확산됐다”며 “대법원장 임명마저 오로지 정치가 좌우한다는 결과가 확인되면 판사 사회의 학습효과가 굳어지는 게 아닐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야당에 포진한 최기상·이탄희·이수진 의원 등 법관 출신 정치인들에 대한 불만도 팽배하다. 이들이 대법원장 후보 부결 사태의 주역이라는 말이 돌면서다. 한 고법부장 판사는 실명 언급은 피하면서도 “일을 저지르고 법원을 나가 정치인으로 변신하더니 법원을 다시 정치화시키고 있는데 이는 법원을 망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중견 판사는 “이 후보자 낙마는 김명수 체제 출범시켜 법원의 행정 권력을 차지한 소수의 정치 법관과 법관출신 정치인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발버둥친 결과”라며 “권력욕이 재판 정상화를 가로막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신속이냐 신중이냐…기로에 선 尹

다시 공은 대통령실로 넘어온 상황이다. 서초동의 한 판사는 “우리가 후보를 내세운 것도 아니고, 대책을 만들어 줄 수도 설득 작업을 할 수도 없고 대통령이 좋은 후보를 지명해 입법부에서 대승적으로 결정해주길 바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새 후보로는 오석준 대법관, 이종석 헌법재판관, 조희대 전 대법관, 홍승면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이 거론된다. 오 대법관은 가장 최근에 청문회를 통과했다는 점에서 안전한 카드로 보일 수 있으나 “대통령과 친하다는 이유로 이균용 후보자가 공격받았는데 오 대법관도 마찬가지일 것(한 고법부장)”이란 얘기가 나온다. 조 전 대법관은 올해 66세로 대법원장 임기를 채울 만큼 정년이 남아있지 않다. 이 재판관에 대해선 이미 길을 달리한 헌법재판관을 대법원장에 지명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라는 평가도 있다.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한 지법 부장판사는 “법원 정상화를 위해선 재판 및 사법행정 능력이 최우선 기준이 돼야 하지만, 그런 인물들이 임명 동의안 가결 가능성이 높을지는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대법원장 공석 사태는 단기적·내부적으로 대법원 재판과 법관 인사에, 외부적·장기적으론 모든 재판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대법원 판결은 1·2심 재판에 일종의 지침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유사 사건 대법원 선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다수의 하급심 재판들의 일정도 함께 밀릴 수 있다. 대법원장 공석→대법관 인선 불가→소부·전원합의체 선고 지연, 법관 인사 지연→ 하급심 재판 지연으로 ‘지연 도미노’가 벌어진다는 얘기다. 한 고등부장 판사는 “장관이 공석이어도 행정부는 돌아가지만, 대법원장이 없으면 재판은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다”며 “궁극적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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