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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스존의 독일 음악 짝사랑, 국가주의에 배신당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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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호 20면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예술가 개개인의 삶은 그들의 작품 만큼이나 천차만별이다. 굳이 공통점 하나를 찾자면 아마도 가난이 아닐까. 예술가 중에서 유독 가난하게 사는 것은 대체로 음악가이다. 미술이나 문학은 작품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라 거래가 쉬웠던 반면, 음악은 한번 들으면 사라져버리는 소리여서 사고팔기 어렵고 그래서 수입을 얻기가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 유명했던 바흐조차 가족의 생계를 걱정할 정도였으니 다른 음악가들의 사정은 오죽했으랴.

그러나 어디에나 예외가 있는 법이다. 팰릭스 멘델스존이 바로 그 예외에 해당한다. 멘델스존은 말 그대로 금수저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당대에 존경받는 철학자였고 아버지는 베를린의 은행가로 자기 은행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돈이 많았다. 게다가 그의 외증조부 역시 엄청난 대갑부였다. 1755년 당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가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화폐 개혁을 단행했을 때 그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이익을 얻은 사람이 바로 그였다.

멘델스존 부친, 집에서 정기 음악회 열어

멘델스존 동상. [사진 Morn the Gorn·사회평론]

멘델스존 동상. [사진 Morn the Gorn·사회평론]

멘델스존의 부모는 돈만 많은 것이 아니라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노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린 멘델스존과 그의 누나 파니 멘델스존이 음악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자 그의 부모는 카를 프리드리히 젤터를 섭외하여 그에게 음악을 배우게 했다. 그는 베를린 최고의 음악교사이자 괴테와도 친분이 두터웠던 유명 지휘자였다. 심지어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로 유럽 전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이그나츠 모셀레스까지 집에 초대하여 레슨을 받게 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자신의 집에서 정기 음악회를 개최하고 훔볼트, 헤겔, 뵈크 같은 저명 인사들을 초대하여 멘델스존이 친분을 맺게 해주었다.

부모의 극진한 정성 덕분이었을까. 그의 음악적 재능은 일찌감치 꽃을 피웠고 그는 종종 신동 모차르트와 비교되곤 했다. 멘델스존은 11세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는데 14세 생일을 맞을 때까지 무려 4개의 노래극, 수십 개의 종교적, 세속적 성악곡, 여덟 개의 현악 교향곡, 여섯 개의 실내악곡, 다수의 피아노곡과 오르간곡을 만들었다. 멘델스존의 대표적 레퍼토리 중 하나인 현악 8중주 op.20은 16세에,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에 붙인 매혹적인 서곡은 그가 불과 17세 때 작곡한 것이다.

멘델스존은 지휘자로서의 재능도 매우 뛰어났다. 특히 1829년 20살이었던 멘델스존이 지휘자로 공식 데뷔하며 지휘한 바흐의 ‘마태수난곡’ 연주는 독일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마태수난곡’ 뿐 아니라 바흐의 전 작품, 나아가 바로크 시대 모든 음악들이 재조명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바흐가 남긴 가장 중요한 종교음악이었음에도 당시에는 사실상 음악계에서 사라진 레퍼토리였다. 멘델스존이 전곡 악보를 얻으려고 여기저기를 수소문하며 돌아다녔으나 구하기 힘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멘델스존 하우스. [사진 Morn the Gorn·사회평론]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멘델스존 하우스. [사진 Morn the Gorn·사회평론]

멘델스존이 베를린의 징아카데미 무대에서 ‘마태수난곡’을 연주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이를 선뜻 지지해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화려하고 세련된 낭만주의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었으니 그렇게 길고 난해한 음악이 청중에게 먹힐 거라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흐 시대에 성 금요일에 교회에서 연주된 곡을 연주회장의 일반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교회로부터 공격을 받을 위험까지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 것이었다. 무려 천 명이 넘는 청중이 연주회에 몰려왔으며 그보다 몇 배 되는 사람들이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건물 밖에 서 있었다.

이러한 놀라운 성공은 새로운 시대에 맞춘 멘델스존의 곡 해석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는 바로크 시대 고악기들을 빼고 현대적인 오케스트라를 꾸려 150명의 합창단과 연주를 했다. 3시간 반이나 되는 원곡을 반으로 줄인 것도 좋은 반응을 얻는데 한몫을 했다. 독일적 전통과 예술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당시의 시대적 요청도 공연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19세기 초는 아직 독일이라는 국가가 탄생하기 전이었으나,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함께 치룬 전쟁의 영향으로, 독일연방으로 묶여있던 40개 군소국 사람들 사이에서 독일인이라는 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독일인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려면 무엇보다 독일만의 문화와 전통이 필요했는데, 순수 독일 예술을 대표하는 인물로 바흐보다 더 적합한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다.

멘델스존의 활동은 그 이후에도 일관성 있게 독일 음악 정신을 발견하고 계승하는 쪽으로 이어졌다. 183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10년이 넘게 지휘자로 활약했던 니더라인 음악제에서 멘델스존이 가장 선호했던 레퍼토리는 위대한 독일 작곡가들인 헨델과 하이든의 오라토리오와 베토벤의 교향곡이었다. 뒤셀도르프시 음악감독과 라이프치히시 음악감독,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활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독일 내 가장 중요한 오케스트라로 자리 잡은 게반트하우스의 정기 연주회를 ‘역사적 연주회’ 시리즈로 꾸며 과거의 권위 있는 작곡가들의 작품들로 구성한 것은 서양음악의 ‘정전(正典)’을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어떤 해에는 연주회 프로그램을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이렇게 딱 5명의 ‘위대한 독일 작곡가’의 작품들로만 구성한 적도 있었다.

바그너 “유대인은 음악 잘 할 수 없어”

멘델스존이 16살의 나이로 완성한 현악 8중주 E♭장조 악보(1825). [사진 Morn the Gorn·사회평론]

멘델스존이 16살의 나이로 완성한 현악 8중주 E♭장조 악보(1825). [사진 Morn the Gorn·사회평론]

멘델스존은 독일 음악의 유산과 전통을 연주와 공연을 통해서 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문적인 음악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그것을 후대에 전승시키는 것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왕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얻어내는 한편 궁정의 각료들을 설득하는 노력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독일 최초의 음악전문 교육기관인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 음악원의 운영 시스템은 물론, 교수진, 학생 선발, 수업 방식, 교육 내용을 모두 독일 음악 전통의 고수라는 목표에 맞추어 직접 설계했다.

이렇게 멘델스존은 1830~40년대 독일의 음악 전통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동시대 어떤 음악가보다 큰 역할을 했지만, 정작 그 자신이 그 실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독일 음악 전통의 일부가 되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독일에서 태어나고 누구보다 더 열심히 독일을 위해 살았어도, 유대인인 이상 독일인들에게 그는 독일인일 수 없었다. 할례를 받지 않았고 부모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가족의 성을 독일어인 바르톨디로 바꾸었어도 유대인은 그저 유대인이었을 뿐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유대인에 대한 법적 차별을 없앤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유대인을 공공연하게 차별하였다. 게다가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의 민족주의적 주장에 고무되어 독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극단적으로 고취하는 상황이었으니 위대한 독일적 정체성을 멘델스존이라는 유대인의 피로 오염시킬 리가 만무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멘델스존은 생전에 다른 유대인들이 받았던 위협이나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다. 재력 덕분이기도 하고 그가 3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행운이 사후에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가 사망한 이듬해인 1850년 반유대주의자인 바그너는 ‘음악에서의 유대성’이라는 글에서 유대인의 성정은 도저히 음악을 잘할 수 없다면서 멘델스존의 실력을 비판하고 그를 모욕하기에 이른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제3제국이 등장하면서 멘델스존의 명성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타격을 받았다. 나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앞에 서 있던 그의 동상을 철거했으며, 그의 악보들을 폐기하고 작품 연주를 금지했다. 그의 후손들이 운영하던 가족 은행 역시 탄압을 받아 청산되었다. 베를린의 트리니티 묘지에 있던 그의 무덤이 파헤쳐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멘델스존의 예술과 인생은 재능있고 순수한 청년의 서글픈 짝사랑을 연상케 한다. 자신이 온 정열을 바쳐서 헌신했던 독일적 예술이라는 이상에 배신당하고 독일인들로부터 자신의 모든 공헌을 철저히 부정당했으니 말이다. 그나마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쓰린 배신감을 안은 채 모진 삶을 살아가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추구했던 독일적 예술이라는 것의 실체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본래 예술이 국가라는 틀에 잘 들어맞기 어렵고 예술과 국가와의 무리한 만남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것이 다반사였으니 말이다.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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