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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명예 싫다, 방랑하며 작곡 몰두 ‘가곡의 왕’ 슈베르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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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5호 20면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프란츠 슈베르트의 초상. [사진 사회평론]

프란츠 슈베르트의 초상. [사진 사회평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마주한 장례식장에서 그 어떤 조문객의 인사보다 큰 위로가 된 것은 휴게 공간 벽면에 걸려있던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이었다.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비교하곤 하지만 평소에는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물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물질과 권력을 끝없이 욕망하면서.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 내세를 믿는 종교인들도 있고, 깊은 곳에 은둔한 현자들도 있으니까. 음악가들 중에는 슈베르트가 그랬다. 그는 이 세상에 얽매이기를 거부하고 평생을 방랑자로 살았다.

슈베르트는 그야말로 타고난 천재였다. 어려서 그에게 음악을 가르쳤던 미하헬 홀처는 자기가 뭔가를 가르치려고 하면 아이가 이미 다 알고 있어서 가르칠 게 없었다고 말한다. 슈베르트는 열여섯 살에 첫 번째 교향곡을 만들었고, 1년 후에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수록된 시를 토대로 유명한 ‘실 잣는 그레트헨’을 작곡했다. 시에 곡조를 붙이는 일이야 음악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일이어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 곡이 도달한 수준은 다른 노래들과는 클래스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선율은 긴 호흡의 프레이즈와 넓은 음역을 넘나들고, 화성은 절묘하게 긴장감과 클라이맥스를 만들며, 피아노는 장면의 분위기와 인물의 심리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통일된 구조 안에 담겨 강렬하고 아름다운 가곡 ‘실 잣는 그레트헨’이 된 것이다. 바야흐로 낭만주의 예술가곡이 시작된 순간이다.

소수의 친구·지인 위해 작곡·연주

슈베르티아데에서 노래하는 슈베르트. [사진 사회평론]

슈베르티아데에서 노래하는 슈베르트. [사진 사회평론]

그 이듬해 작곡한 가곡 ‘마왕’은 놀랍게도 그보다 더 참신하다. 이번에도 괴테였지만 『파우스트』처럼 격정적인 정형시가 아니라 특별한 언어적 기교가 없는 이야기체의 발라드이다. 시를 따라 음악을 이야기체로 풀어내면서 그는 ‘통절형식’(1절·2절처럼 같은 가락의 반복이 없고 가락이 계속 변하는 형식)이라는 새로운 가곡 형식을 창조했다. 괴테의 마왕 이야기는 슈베르트의 음악 속에서 강력한 힘을 얻는다. ‘한 소년이 아버지 품에 안긴 채 말 위에서 숲을 질주하고, 마왕은 악마 같은 속삭임으로 소년을 유혹하고 소년은 겁에 질린다. 아버지는 아이를 지키려 애쓰지만,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아이는 죽어 있다’. 시종 피아노를 강타하는 옥타브 음형이 말을 타고 질주하는 긴박한 이미지를 만들고 그로 인해 노래를 듣는 내내 숨을 쉬기 어렵다.

슈베르트는 가곡을 쓸 때 시의 내용과 분위기를 완벽하게 포착해서 장면과 감정을 감각적으로 구현했을 뿐 아니라, 선율·반주·화성·형식을 통해 시와 음악을 하나의 이미지로 결합해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만들었다.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시는 그의 손을 거치며 서정적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보석이 되었다. 슈베르트는 곡을 쓰는 속도도 매우 빨라서 ‘마왕’을 작곡한 열아홉 살에만 무려 140곡 이상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를 가곡의 왕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하루가 멀다하고 주옥같은 곡을 쏟아내는 슈베르트를 지켜본 친구 한 명은 “그가 손을 대는 모든 것이 노래로 변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천부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밖에.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많아서였을까. 슈베르트는 세상의 갈채나 명예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외롭지만 자유로운 방랑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에서 보조 교사로 1년간 잠시 일한 것을 빼면 그 흔한 교회 합창단이나 교향악단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않았고, 다른 일로 시간을 뺏기는 것을 싫어해서 제자를 따로 키운 적도 없었다. 오로지 작곡에만 몰두했을 뿐이다. 어쩌다 돈 때문에 마지못해 작곡을 하게 되면 그는 불행해했고, 그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삶은 빈한하고 불안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작곡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의미였기에.

세상의 명예와 부를 갈구하지 않은 대신 그는 신뢰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내밀하게 소통하고 친교하는 것을 즐겼다. 슈베르트의 가곡과 피아노 음악들은 공공 연주회장이 아니라 친분이 두터운 친구들과 지인들의 모임을 위해 작곡되고 소비되었다. 비티체크, 엔더레스, 슈파운이 주도한 ‘슈베르트의 밤’이란 뜻의 “슈베르티아데”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슈베르티아데는 오늘날로 치면 살롱 음악회와 독서 토론회와 사교모임을 섞은 형태인데, 이곳에서는 항상 슈베르트의 작품만을 연주했다. 여기서는 슈베르트가 피아노 연주도 도맡았고 종종 노래도 직접 불렀다. 참석자들은 정부 관료부터 예술가, 학생 등 하는 일이 달랐지만, 모두 슈베르트를 지극히 아꼈고 그의 음악을 진지하게 경청했으며, 그의 음악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슈베르트가 세상을 등지고 살기로 한 데에는 당시 정치적 상황도 한몫을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빈에서는 자유가 완전히 사라졌다. 메테르니히 주도로 반동적이고 억압적인 체제가 형성되고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특히 청년들은 비밀경찰들의 감시와 단속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슈베르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승인되지 않은 가사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제재를 당했으며, 자신이 선택한 오페라 대본 때문에 검열관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그중 몇 개는 수정 후 통과 되었지만 상연 자체가 금지된 작품도 있었다. 이제 빈에서 자유를 잃은 청년들의 투쟁 의지는 점차 약해졌고 인생의 허무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숨지기 1년 전 ‘겨울 나그네’ 남겨

‘마왕’ 자필악보. [사진 위키피디아]

‘마왕’ 자필악보. [사진 위키피디아]

이러한 경향은 슈베르트의 교향곡에서도 드러난다. 당시에는 열정적이고 투쟁적인 서사를 만드는 베토벤의 교향곡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슈베르트는 그런 공격적인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 슈베르트의 교향곡들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발전도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노래처럼 감미로운 테마, 매혹적인 음색, 서정적 감성에 집중한다. 그의 교향곡들은 기본적으로 걷는 리듬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방황, 쉴 사이 없이 뛰는 심장의 고동이며, 거기에는 쉴 곳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 있을 뿐이다. 그가 의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의 개성적인 교향곡들은 새로운 길을 찾던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들에게 교향곡이 나아갈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슈베르트가 자신을 이 세상의 방랑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방랑 생활을 노래한 그의 작품이 가곡만 열 개가 넘는다. 가곡 ‘방랑자’에서는 탄식하는 자가 계속 묻는다. “어디지? 도대체 어디지?” “이곳의 태양은 차갑구나. 꽃들은 시들고 삶은 오래되었구나. 사람들의 말은 공허하게 들린다.” 그런 그에게 마음의 숨결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네가 없는 바로 그곳에 행복이 있다!” 스무 살 슈베르트가 인생의 공허와 회한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 가곡의 주제는 몇 년 후 작곡된 슈베르트 피아노의 최대 걸작 ‘방랑자 판타지’의 주요 모티프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젊은 슈베르트의 낭만적 방랑은 갑자기 종말을 고한다. 매독에 걸린 것이다. 항생제가 없었던 시절 매독은 불치병에 가까운 무서운 질병이었다. 그는 이 병으로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점차 젊음의 활기를 잃어버렸고 결국 다시는 건강을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망하기 1년 전 그는 가곡사에서 최고로 꼽히는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작곡한다. 실연의 상처를 간직한 남성 화자가 차가운 겨울에 향수와 체념을 담은 추억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다. 일상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여행은 낭만주의 시대 예술에서 식상할 정도로 흔한 주제이지만, 이 여행이 특별한 것은 그 종착역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겨울 나그네’에 수록된 24개의 노래들은 때로는 극적이고 때로는 순진무구하지만 하나같이 음울하고 고독하며, 어둡고 공허하다. 이 다양한 선율들을 통해 다가오는 죽음에의 예감과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한 회상이 절묘하게 교차한다.

여행을 떠나듯 그렇게 슈베르트는 31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소원에 따라 빈 중앙 묘지의 베토벤 곁에 묻혔다. 친구들은 그의 묘비에 “음악은 여기에 풍요로운 보물을 묻었노라. 그보다 더 소중한 희망과 함께” 라고 적었다. 그에 대한 사랑과 그를 잃은 슬픔을 이토록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갔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를 보내지 않았다. 그가 만든 아름답고 애잔한 음악은 오늘도 우리 귓가를 맴돈다. 자유로운 영혼이 부르는 나그네의 노래가.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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