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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광’ 슈만, 조울증 견디며 예술적 상상력 꽃피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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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3호 23면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1847년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의 석판화. [사진 사회평론]

1847년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의 석판화. [사진 사회평론]

위대한 예술가는 영혼의 노래를 듣는다고 한다. 과장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남들과 똑같은 소리를 들어서는 독창적인 예술작품을 만들 수 없을 테니까. 예술의 역사를 보면 평범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을 강하게 지향하던 시기가 있었다. 바로 낭만주의 시대이다. 이 시대의 예술은 현실 세계를 초월한 동화같이 신비로운 마법의 세계가 펼쳐지고, 낯설고 경이로운 정서가 넘쳐난다. 낭만주의를 말하는 로맨티시즘이라는 단어 자체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중세 기사문학 로망스에서 유래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낭만주의 운동을 주도한 것은 괴테와 실러로 대표되는 19세기 독일 문학이다.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영감은 대부분 이러한 문학작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낭만주의 음악가 가운데 문학에 대한 애정이 유독 각별했던 사람이 로베르트 슈만이다. 슈만이 어려서부터 문학 소년이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슈만의 아버지는 서점을 운영하며 살았지만 가게는 뒷전이고 서재에 파묻혀서 소설을 쓰는 일에 몰두할 정도로 문학 광이었다. 그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했던 슈만은 괴이한 공상이나 무시무시한 기담을 펼쳤던 루트비히 티크, 장 파울, 호프만 같은 낭만주의 작가들을 좋아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아예 외우고 다니며 시를 낭송하는 바람에 친구들은 그를 파우스트나 메피스토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슈만 곡으로 각지서 페스티벌

음악가가 된 후에도 슈만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시들지 않았다. 250편에 달하는 그의 가곡들이 그 방증이다. 그 가운데 최고 걸작은 슈만이 가장 좋아했던 시인인 하이네의 시들로 만든 『시인의 사랑』일 것이다. 하이네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시들 안에는 사랑으로 인한 설렘, 갈망, 번뇌, 아픔, 체념의 감정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러한 복잡한 감정들은 슈만의 손을 통해 더 미묘하고 생생하게 살아난다. 피아노는 감미로운 멜로디로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순간순간 주저하고, 사랑에 들뜬 노래 곡조 밑으로 불안이 살며시 배어난다. 사랑의 감정에 푹 빠진 한 남자를 이보다 더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슈만이 묘사하는 실연의 감정은 더욱 리얼하다. 피아노의 복잡한 음형은 원망과 분노로 불타고 있는데 가사는 가슴이 터진다 해도 결코 그대를 원망하지 않겠다고 외친다. ‘꿈속에서 보니 자기를 버린 사람도 아퍼하더라’고 말하며 동병상린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남자는 자기가 사랑한 여자의 결혼식에서 들리는 요란한 음악 소리에 숨어 흐느끼기도 하고, 너무도 슬프고 외로워 꽃과 대화를 하기도 한다. 사람에게 꽃이 말을 거는 이 비현실적인 순간에 절묘하게 울리는 불협화음은 청중을 환상의 세계로 이끈다.

츠비카우의 슈만 생가 내부. [사진 Vwpolonia75·Hans Weingartz·사회평론]

츠비카우의 슈만 생가 내부. [사진 Vwpolonia75·Hans Weingartz·사회평론]

슈만의 문학적 상상력은 가곡에서뿐 아니라 피아노 음악에서도 여실히 진가를 발휘한다. 그의 첫 피아노 작품인 ‘아베크 변주곡’은 파올리네 폰 아베크라는 여인에게 헌정된 것으로 슈만은 곡의 주제를 ABEGG란 이름의 알파벳에서 가져왔으나 이 여인 자체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었다. 슈만의 피아노곡 중에는 ‘크라이슬레리아나’처럼 기존 문학작품 속 인물들이 나오기도 한다. 카펠마이스터 크라이슬러는 낭만주의 환상문학의 선구자 호프만의 작품에 나오는 비극적인 음악가인데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에서는 슈만 자신이 원했던 음악가의 이상적 모습과 겹쳐지면서 매력적인 인물로 변신한다.

슈만이 상상으로 만들어서 음악 속에 등장시킨 가상의 인물들도 한둘이 아니다. ‘카니발’과 ‘다비드 동맹 무곡’에서는 여러 명이 단체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슈만이 음악계의 속물들을 타도하겠다며 조직한 가상의 비밀 단체인 ‘다비드 동맹’의 조직원들이다. 여기에는 완전히 허구의 인물도 있지만, 훗날 아내가 되는 클라라 같이 그와 친분이 있던 주변의 음악가들과,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베를리오즈, 쇼팽, 파가니니, 멘델스존 등 자기가 존경하는 음악가들도 포함되었다. ‘카니발’에서는 이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이 한 명씩 가장무도회에 참석하여 화려한 원무를 펼치고, ‘다비드 동맹 무곡’에서는 그들이 한층 심오한 시적 상징으로 신비롭게 등장한다.

평론가로서도 활약했던 슈만은 ‘다비드 동맹’의 멤버들이 가상 좌담회를 하는 형식으로 평론을 쓰기도 했다. 이 토론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은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이다. 슈만은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를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소개했지만 사실 이들은 슈만 자신의 분신이다. 둘의 성격이 극과 극으로 다르다는 점이 흥미롭다. 플로레스탄은 활발하고 충동적이며 추진력 있는 혁명가 스타일이고, 오이제비우스는 조용하고 명상적이며 관조적인 몽상가이다. 둘은 사사건건 부딪쳤고, 현명하고 성숙한 마이스터 라로가 나서서 두 사람을 중재한다. 이들 사이에 오가는 번득이는 대화는 때로는 격렬하지만 기발한 위트가 넘쳐서 독자들에게 커다란 재미를 선사했다.

정신병원서 외롭게 투병하다 숨져

슈만이 입원했던 정신병원의 현재 모습. [사진 Vwpolonia75·Hans Weingartz·사회평론]

슈만이 입원했던 정신병원의 현재 모습. [사진 Vwpolonia75·Hans Weingartz·사회평론]

슈만은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를 통해 자기 대신 토론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아예 이들의 이름으로 작곡까지 했다. ‘피아노 소나타 1번’이 그 첫 번째 작품인데 그는 이 곡을 클라라에게 헌정하면서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가 작곡한 것이라 했다. 그의 ‘환상곡 C장조’ 역시 원래는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의 소나타’라는 이름으로 출판할 계획이었다. 이렇게 슈만은 자유롭게 상상의 세계를 날아다니며 창작 활동을 이어갔지만, 한편으로 그의 정신 상태는 더욱 불안하고 위태로워졌다. 젊어서부터 뜨거운 열정과 우울한 좌절감이 끊임없이 교차 되는 양극성 정동 장애인 조울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는 그의 분열된 자아였을지도 모른다. 어떤 때는 창작욕이 용솟음치는 흥분 상태가 되어 환상적인 선율들 사이를 오갔으나 우울감이 찾아오면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의기소침하게 어두운 터널에 갇혀 있었다. 고양된 기쁨과 절망 사이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슈만의 심신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약간의 비판에도 슈만은 쉽게 무너졌다. 대표적인 경우가 그의 결혼이다. 슈만은 19살 미성년자였던 클라라와 부모 동의 없이 결혼하기 위해 클라라의 아버지인 스승 비크와 재판까지 해야 했는데, 그가 정신적으로 비정상이며 만성 알코올 중독자라는 스승의 비판으로 커다란 상처를 입고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클라라에 대한 신뢰도 깊지 못해서 클라라로부터 조금만이라도 소식이 없으면 의혹과 실망으로 탈진 상태가 되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절망에 빠져 버리면 한동안 깊은 우울의 수렁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슈만은 결혼한 지 4년째 되던 해에 아내 클라라의 러시아 연주 투어에 동행했다가 수 개월 간의 고된 일정으로 인해 여행이 끝나갈 무렵 심각한 신경쇠약에 걸려 버렸다. 이때는 급성 우울증과 강박증뿐 아니라 언어 장애와 시각 장애까지 나타났다. 이후 10년 동안 슈만의 양극성 정동 장애는 더욱 심해져서 조증일 때는 미친 듯이 작품을 쏟아 내고 울증일 때는 무기력하게 절망하기를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불면증, 정서불안, 분노조절 장애를 겪었고 만성 피로, 이명, 경련 같은 증상들도 자주 나타났다. 그러면서 슈만은 점차 작곡은 물론 지휘 같은 일상적 연주 활동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오히려 작곡가로서 슈만의 명성은 국내외에서 절정에 달했고 슈만의 작품만으로 각지에서 페스티벌이 열릴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슈만은 더 이상 아무 일정도 소화하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것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일까. 슈만은 환청에 이끌려 잠옷과 슬리퍼 차림으로 나와 라인강 다리에서 강물로 뛰어내린다. 다행히 지나가던 어부에 의해 구조가 되었으나, 슈만은 그 배에서조차 뛰어내리려고 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본 근교의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거기서 2년간 홀로 투병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정서적 안정에 해롭다는 이유로 가족도 만나지 못한 채.

슈만에게 조울증은 창작을 위한 힘이면서 동시에 그를 파괴하는 두 얼굴의 존재였으며 평생 떨쳐낼 수 없었던 그림자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는 탁월한 작품을 만들어냈지만 그래서 고통스럽고 불행했다. 화려하고 감상적인 낭만적 작품의 이면에 결코 낭만적일 수 없었던 한 예술가의 고통스런 인생이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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